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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ST Jul 18. 2016

현대인의 죽음

요양병원에서 끝을 맞이한다는 것

군대 말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공군으로 연가를 써서 육군보다는 자주 나올 수 있었지만,

어느날 입원해서 지난 휴가때는 병원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다음 휴가 때는 의식이 없으시고,

그러던 어느 아침 부대로 아버지의 전화가 왔고, 그렇게 장례를 치렀을 뿐이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수발한 것은 아니었다.


약 두 달 전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시고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후 수술로 호전 기미를 보였다가 다시 악화되셔서 식사도 못하시는 상태를 반복하시다가,

어제 중환자실로 이동하셨다.


지난주에 문병 갔을 때만 해도 힘들어하시지만 말씀을 하셨었다.

할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부르며 하시는 말씀이,

여주(고향)로 가겠다고 하셨다.

다른 가족에게 말하면 '에이 아버님 여주를 어떻게 가요'하는 식으로 넘기다 보니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와 각별하다.

서울에 살면서는 수원 고등동 집에 가는 일도 뜸해졌지만,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잤었기에

더 각별한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도 손주 중에 날 가장 예뻐하셨다.


뭔가 안타까웠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부담되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고향 한번 가보고 싶으신 것일지도 모른다.

경기도 수원에서 경기도 여주, 먼 거리도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여주를 그리워하셨다.

수원에서도 여주 관련 지역신문을 받아보실 정도였다.


과거의 죽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평생 동안 살아온 같은 장소에서,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조금 이상적이지만 아름답게 작별할 수 있는 그런 광경

할아버님께도 드리고 싶지만, 야속하다.

직장이 서울이니 사실상 평일에 병원에 찾아가뵙지도 못했고,

주말에 1시간 정도를 뵙는 게 다였다.

그나마도 이제는 끝일지 모른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버지의 전화가 오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그런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일까.


사실 가능하다면 지금도 수원 요양병원 가서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다.


2주 전인가, 할아버지 병상 옆에 앉아있다가 그냥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손에 얼굴을 부볐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정말 몇 년 만에 활짝 웃으셨다.

굉장히 아파하실 때인데도, 그 순간 분명히 웃으셨다.

나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 그 순간 옛날로 잠시 돌아갔던 것이다.

할아버지 손에 얼굴 부비던 어린 손주로 잠시 동안 돌아갔고, 할아버지도 같은 감정을 공유했음을 느꼈다.


요양병원에서 지금도 할아버지께서는 고통스러워하고 계신다.

나는 내일 회사에 나가서 시키는 일들을 해야만 하고...

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만 있다는 자괴감이 든다.

거리와 시간을 초월해서 늦었을지 모르지만 할아버님이 행복하게 떠날 수 있도록

곁에 더 있고 싶다. 더는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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