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편 우리 편!
"광화문 전체에 은근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폭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감. 병장기를 꺼내 드는 소리, 전열을 가다듬는 목소리가 살풍경한 빌딩 숲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듯했다."
"수평 비행으로 강을 건너는 새들이 순간, 구두점처럼 하늘에 찍혀 있다. 새들은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다가 속도를 냈고, 화살처럼 머리 위를 휙 지나갔다. 하늘엔 색깔이 없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Q. 위 인용구 두 개를 비교하여 웹소설과 소설로 구분하면?
지적 허영으로 충만하던 20대 때에는 대중문화나 B급 문화를 등한시하곤 했다.
예술만 못하다며 '급'이라도 매기려 했던 듯하다.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한 번은 BL(Boys Love, 남성 동성애 장르를 일컫는 콘텐츠 분류) 광팬인 대학 동기가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 알고는, 꼭 읽어보라며 예약 구매한 소설책 한 권을 빌려줬다.
표지며 내지 디자인이 조악한 느낌이 들었지만, 잘 쓴 글이라니 읽고 싶었다.
단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강렬했다.
술술 읽히는 문장력 하며, 복선과 잘 맞아떨어지는 사건 전개.
어떤 면에서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문단에서 쏟아내는 글보다 나았다.
그만큼 잘 쓸 자신도 없었다.
(장르 특이성을 따라잡을 자신도 없다.)
재야의 은둔고수가 여기저기 활개를 친다.
브런치 구독자 수가 꼭 그 작가가 쓰는 글이 갖는 작품성과 일치하지는 않듯.
예술은 특유의 모호한 상징을 통해 보통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남겨둔다.
이 모호함이 예술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며 권위를 벽처럼 두르고 한 계단 높이 올라간다.
난해한 예술은 대체로 더 좋은 평가를 받고-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대중은 예술 영역 밖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때로는 작가도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흘려 놓고는, 열린 결말이라고 던져두기도 한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다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중의 잣대는 날카롭고, 다수이며, 직설적이다.
각 사건 간 개연성이 조금만 부족해도 웹소설 독자들은 '하차'를 들먹인다.
그래서 예술만큼 지루한 문장이 없고, 난해하거나 개연성 없는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자, 그럼 이제 누가 승자이지?
당연히 그런 건 없다.
개별 문화 콘텐츠가 담당하는 영역이 있을 뿐.
나는 19살에 수능을 마치자마자 이영도 작가 작품 <드래곤 라자>를 하루에 서너 권씩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본업이 소설가인 교수님은 나와 취향이 같았다.
같은 작가가 쓴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는 문학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시며.
나는 그가 했던 얘기가 참 좋았고,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다수의 콘텐츠는 진열대에 진열하는 상품처럼 특정 타깃 소비자를 염두에 둔다.
각 소비자가 원하는 코드를 구현해 내야만 '팔릴' 수 있다.
그게 예술이든, B급이든.
그래도 적어도 한 가지는 같다.
많은 사람이 보유한 시대 감각과 관통하는 콘텐츠라면,
그게 무슨 코드로 짜였든 유행이 되고 스테디셀러가 되고 고전이 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인용구는 싱숑 작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따왔다.
두 번째 인용구는 제임스 설터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가져왔다.
요 며칠 글을 쓸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몇 밤이고 무엇을 쓸지를 상상하며 잠들었다.
계속 쓸 수 있기를(더 잘 쓰면 좋겠지만, 수영처럼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다).
내일도 고군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