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인어공주>를 좋아한다. 그 시절의 박해일이라니... 누구나 가슴 한켠에는 해사한 박해일 하나쯤은 품고 사는게 아닐까. 처음에는 그랬다. 아 너무 예쁜 사랑이야기! 박해일 너무 좋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볼때마다 감상은 변해만 갔다. '와 박해일' 이 아니라 '아 박해일...' 이 되어가는 과정(물론 극중 인물을 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은 흐르고, 사랑은 지나갔고, 환상은 걷히고, 지독한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인어공주는 아주 독특하고 흥미로운 판타지영화다. 과거로 돌아가 젊은 시절의 부모를 만나는 이야기. 원조격인 <빽 투더 퓨쳐>가 '나'의 존재가 지워질까봐 고군분투하는 코믹극이라면, <인어공주>는 그 시절 부모이기 전에 한 여자-남자였던 내 부모의 삶을 담담하고 예쁘게 그려낸다.
저랑 같이 공부해요
연순(전도연 분) 과 진국(박해일 분) 은 너무 예쁘고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사랑도 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질정도로 아름답고 순수하다. 연순은 읽지도 못하는 편지를 동생에게 부탁해서 매일 보내고, 한번이라도 진국의 얼굴을 보기 위해 동네방네 음식을 해다 나른다. 둘은 한글공부를 하며 친해지고 마침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으로 서로에게 자리잡는다. 게다가 전도연-박해일 두 배우의 넘치는 매력이라니... 관객은 단번에 이들의 사랑이야기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쩐지 내내 슬퍼서 눈물이 났다. 우리 엄마가 자꾸 떠올라서였다. '엄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싶어서 눈물이 났고 '저렇게 맑고 순수했던 한 사람이 그렇게 고생을 하며 살았던거구나' 싶어서 눈물이 났다. 엄마도 아빠랑 사랑했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외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것이겠지. 영화 속 김진국-조연순의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현실이 너무 대조되서 더욱 슬퍼졌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힘들었던게 아니라,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서 저렇게 힘들어지는 것도 인생이구나.
착하죠, 그래서 더 힘들어요
영화 속 나영(전도연 분)은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엄마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착하죠?
그래서... 더 힘들죠.
착한게 가까운 사람한테는
힘들게 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도 그럴것이 나영의 아버지는 그 착한 심성으로 여기저기 보증을 서서 집안을 말아먹었다. 일찌감치 생계전선에 내몰린 나영의 엄마는 목욕탕에서 젊은 여자들의 때를 밀어주며 악착같이 살고있고, 나영은 대학도 못가고 항상 '나중에'를 달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김진국씨는 착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누구한테나 착했고 그런 점을 좋아했던 거였지만, 결국 그 착함에 발목잡혀 모두의 인생을 괴롭게했다.
젊은 시절의 엄마를 만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엄마가 아빠를 너무 사랑하고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면 웃으며 그 만남을 축복해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 이후의 삶들을 너무 잘 아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결혼을 말릴 것 같다. '엄마 그 사람 만나지마. 그 사람 만나면 엄마 너무 힘들어. 지금은 둘이 너무 사랑하는거 알겠는데, 그런 사람 만나지마 제발 부탁이야' 사랑은 짧고 현실은 길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만나서 고생을 너무 많이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절대로 그 만남을 축하해줄 자신이 없다.
<인어공주>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영화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더 이상 섬을 배경으로 해사하게 웃는 박해일과 특유의 매력으로 햇살에 검게 그을린 전도연의 사랑이야기로만 남지 못한다. 나는 고두심이 우는 장면과 억척스럽게 싸우는 장면과 가구를 주워오는 장면에서 계속 눈물을 훔쳐아만 했다.
한 때의 사랑과 젊음이 아무리 빛나면 무얼하나.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엄마에게 그딴 결혼은 하지말라고 소리라도 지를 것이다. 아름다운 과거는 한 철 뿐이다. 아빠는 필요없다. 내가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어코 그럴수만 있다면, 그런 일이 생길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엄마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편을 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