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지음 May 28. 2024

2. 날씨가 좋으니 기분도 좀 좋아볼까

항우울제 복용 5일 차

날씨가 쾌청하다. 

쾌청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아쉬울 정도. 

파란 하늘엔 뭉게 구름이 가득하고, 서울 시내의 산들이 굽이굽이 멀리까지 보인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인데, 일부러 아침에 집을 나섰다.

좋아하는 동네에 일찍 가서 혼자 작업을 하다가 친구를 만날 생각으로 말이다. 

집을 나서자마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빛깔의 하늘로 시야가 탁트이고, 살갗에 닿는 바람은 기분좋게 간질거리고. 

뜨겁지도 따갑지도 않은 적당한 햇살까지. 

일 년에 며칠 없는 내 기준 완벽한 날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날씨에 컨디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항우울제를 먹으면서 감정 기복이 조금 덜해졌나 싶었는데 또 이런 날씨에 설레는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날씨가 좋다고 컨디션이 상승하는게... 과연 좋은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이렇게 올라온 기분을 뜀틀 삼아, 내가 그리도 필요로 하는 생산력과 추진력을 좀 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씬 하나라도 써보자. 오늘은 그거면 된다.


***


어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업계 친구(?)를 만났다. 

사적으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내가 이 업계에 진입하면서 다시 재회하게 된 인연.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있던 그녀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이 세계를 멋지게 버텨내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해준 수많은 말 중 유독 인상깊게 남은 말이 있다. 


- 언니, 이 일을 하면서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어요. 지금이야 시대가 좋아서 이렇게 작품으로 나오지, 옛날에는 이런 상상을 하는 거 자체로 미친 사람 취급 받지 않았겠어요?


이상하게 이 말이 그리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내게 이런 조언도 해줬다. 


- 동앗줄을 많이 만들어놔요, 언니. 취미든, 가족이든, 연애든, 투잡이든. 일이 어그러졌을 때 심적으로 잡을 수 있는 동앗줄들 말이에요. 


그녀와의 짧은 브런치 약속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어제 같이 일하는 피디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냥 그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심란함과 무기력, 그래서 도무지 결과물을 낼 수 없는 상태에 대해 털어놓을 용기가 생긴 거다. 

내가 유별난 게 아니기에, 받아들여 질거라는 일말의 믿음이 샘솟았다. 

저 우울증이래요.. 이런 말까진 못했고 심란해서 글이 잘 안써진다.. 정도로만 운을 띄웠다. 


- 이해해요. 작가님. 그러실만 해요. 요즘 업계가 어려워서, 다른 작가님들도 다들 힘들어 하시는 시기인 것 같아요. 글은 천천히 쓰셔도 되니, 작가님 건강 먼저 챙기세요. 우린 계속 같이 갈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마시고요. 작가님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건네주는 위로와 공감, 이해에 울컥 감정이 올라왔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어른이니깐. 프로니깐. 


통화가 끝나고나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솔직한 것이 별 거 아닌데, 내가 조금 솔직해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건데. 

그동안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리 드러내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이제야 직장인의 속성에서 탈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조직 속에서 기능해야 하는 내 모습이 너무 당연해서, 무언가 삐죽 튀어나온 듯한 스스로를 드러내는게 두려웠는지도. 오락가락하는 기복으로 일에 지장을 받는 내가 너무 못나보여서 무서웠는지도. 


이제야 나는,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나의 속성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과도기라, 적응기라. 이렇게 힘들게 앓고 있는 건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1. 샛초록색 알약과 시작하는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