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ecord - 진주 (1)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떤 가게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굳건히 자신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있다. 예전에는 레코드점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던 음반 판매점이 바로 그곳이다. 내가 사는 진주에도 꽤 많은 레코드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들 사라지고 세 곳 정도의 가게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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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시내에 위치한 CD뱅크는 10대 시절 내가 가장 많이 CD를 샀던 곳 중 하나였다.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CD뱅크에 오랜만에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님이 친절한 목소리로 방문객을 반긴다.
“안쪽에는 예전 앨범이고, 앞쪽에 최신 앨범이 있어요. 찾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사장님에게 나는 일단 둘러보고 찾는 게 안 보이면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얘기했다. 오랜만에 온 CD뱅크는 익숙하지만 생경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드나들 때는 원하는 가수의 앨범만을 바로 구입하고 가게를 빠져나갔던지라 이렇게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요와 팝송 코너에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가수들의 앨범이 가득 꽂혀 있었다. 언젠가 온라인에서 보았던 글에서 이곳에서 장국영 앨범을 구입했다는 후기가 떠올라 혹시나 장국영 앨범이 남아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매의 눈으로 CD 진열장을 스캔했지만, 장국영의 앨범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DVD매대에서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인 <천녀유혼>과 <성월동화>를 발견했는데,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DVD매대에는 옛 영화들이 가득했다. 천녀유혼의 VCD 겉면에는 오천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져 있었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천녀유혼은 무려 세 개나 꽂혀있어서, 그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걸로 고르는 행운을 누렸다. 천녀유혼 VCD를 손에 들고, 또 뭘 살까 고민하다가 요즈음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그룹 세븐틴의 앨범을 발견했다. 앨범 겉표지는 같지만 내부 속지가 멤버별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은 터라 이왕 살 거면 제일 관심 가는 멤버의 사진이 실린 앨범으로 사고 싶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 혹시 세븐틴의 이번 앨범 재고가 더 있냐고 조심히 물었다. 사장님은 있다며, 카운터에서 입고된 세븐틴 앨범을 전부 꺼내어주었다. 사장님과 함께 밀봉된 앨범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희미하게 보이는 색색의 속지가 어느 멤버인지를 유추하며 작은 수다를 떨었다.
“옛날에는 앨범이 한 종류만 나와서 어떤 걸 사도 다 똑같았는데, 요새는 어렵네요.”
“어휴. 그러게요. 종류가 워낙 많아서 저희도 팔면서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사가는 학생들도 뭐가 나올지 몰라서 랜덤으로 찍는다 하더라고요.”
옛날과 다르게 요즘 아이돌 앨범은 1종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어서 파는 입장에서도, 구입하는 입장에서도 복잡해진 것 같다. 인터넷에 올라온 속지 사진과 대조하면서 앨범을 살펴보니 내가 찾는 멤버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이왕 사기로 한 거 다른 멤버여도 한 장 사야겠다 싶었다. 천녀유혼 VCD만 사고 나가기 미안하기도 했고. 천녀유혼 VCD와 세븐틴 앨범을 계산하며 사장님에게 CD뱅크의 이름 뜻에 대해 물었다. 은행이 주변에 많아서 CD뱅크라 지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라웠다.
“우리가 53년이 된 가게예요. 예전에는 지구 레코드사였는데, LP가 사라지면서 레코드사라는 이름을 계속 가져가기가 힘들어서 이름을 바꾸게 됐어요. 이름을 바꿀 당시에 서울에 유명한 음반판매점 이름이 CD뱅크여서 거기서 이름을 따왔어요.”
내가 어릴 때 에도 있던 곳이라 어렴풋이 20년은 넘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53년이라니. LP시대부터 쭉 운영해온 사장님이 존경스러웠다. LP가 점점 사라져 가고, CD 시장도 전체적으로 쪼그라든 시절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가게를 운영해나갔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장님에게 요즘은 어떤 앨범들이 잘 나가냐고 물어보니 NCT, 더보이즈, 세븐틴 같은 아이돌 앨범이 잘 나간다고 했다. 케이팝 시장이 커지면서 아이돌 앨범 판매량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한국 음반 시장도 전체적으로 커졌다. 시장은 커졌지만 유명 가수나 아이돌 앨범을 제외하고는 판매량이 현저히 낮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함은 있지만, 그들로 인해 오프라인 음반판매점이 유지되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는 부분에서 참 고맙게 느껴진다. 나의 유년기의 추억이 녹아있는 이 작고 아담한 음반 판매점이 53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더 오랜 시간 버텨주길. 혹시 내가 원하는 앨범이 입고되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연락처를 남기고 CD뱅크를 나섰다. 공책에 연락처와 앨범명을 적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짙은 아날로그의 향기가 풍겨오는 가을 저녁이었다.
CD뱅크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1056
055-741-7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