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문수암 템플스테이
매번 산청에 위치한 문수암에 가고 싶었지만, 예약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암은 사찰 중에서도 공양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암자의 특성상 다른 곳보다 템플 스테이 신청을 받는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영부영 올해도 문수암에 가지 못하게 될까 싶어서 다른 절을 물색하고 있는 찰나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들어가 보았던 예약 신청 페이지에 내가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가능하다는 표시가 떴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예약 불가였는데. 누군가가 부득이하게 신청한 걸 취소한 모양이었다. 취소한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잘 된 일이었다. 그 덕분에 드디어 문수암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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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찍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덕산으로 향하는 버스표를 미리 끊고, 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조성진의 드뷔시 앨범을 들으며 조우리 작가의 소설 <라스트 러브>의 첫 장을 넘겼다. 공부를 위해 읽고 있던 다른 책도 있었지만, 잠시 복잡한 문장은 내려놓고 소설을 읽고 싶었다. 귓가에서 조성진의 연주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나는 격정적으로 연주가 치달을 때마다 점점 더 소설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얼마나 읽었을까. 문득 시간을 보니 슬슬 터미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덕산행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덕산행 버스는 선착순 승차여서 버스표에 따로 시간이 기입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타야 할 시간이 명확했다. 오후 12시 40분 버스를 반드시 타야 했다.
다음 버스는 1시 40분쯤에 있었기에, 그걸 타고 덕산 사리마을에 내려서 문수암까지 걸어간다 치면 입실 시간에 늦을 게 분명했다. 12시 40분 버스를 타고 내린다면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섰고, 나는 그 확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12시 40분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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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내버스처럼 산청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내려주던 버스는 1시 25분에 나를 사리마을에 내려주었다. 사리마을 정류장에 내리자 문수암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를 반겼고, 나는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청명했고, 길의 양옆으로는 주렁주렁 감이 잔뜩 매달려있었다. 같은 가지에 달려있는 게 무색하게도 어느 감은 샛노란 모양이었고, 다른 감은 주황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아직 덜 익은 노란색의 감을 보며 ‘망고 같네.’라고 중얼거리면서, 태국의 망고를 떠올렸다. 아주 달큰하면서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던 식감의 망고를.
걷는 길 내내 감나무가 정말 많아서 마치 과수원 사이를 거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내 머리색도 노란색이어서 걸어 다니는 감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맞춘 것도 아닌데 감과 비슷한 색을 하고서 걷는 모습이 뭔가 재밌어서 평소에는 잘 찍지도 않는 셀카를 기념으로 한 장 남겼다. 반사 거울에 대고 찍어서 얼굴이 다 가려져서 셀카라고 하기에는 어중간 하긴 하지만.
길 중간중간 감나무가 없는 구역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듣기 좋아서 나는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이제 더 이상 노래를 들으면서 걸을 필요가 없었다. 청아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야 말로 가장 좋은 음악이니까.
천천히 풍경을 구경하며 걸어 올라가다 보니 문수암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걸은지 한 시간 만이었다. 2km 정도의 거리기에 평소 걷는 속도라면 삼십 분도 안 돼서 다 걸었을 테지만,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이기에 평지가 아니기도 했고 중간중간 멈춰 서서 풍경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생각보다는 꽤 긴 시간을 걸었다. 그래도 좋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걷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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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짧은 길이었지만, 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왼쪽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울창하게 우거진 산의 풍경이 보이는 게 좋았다. 경내로 진입하는 계단 또한 매력적이었다. 계단의 양쪽에 꽃들로 꾸며진 화분이 놓여져 있어서 예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암자답게 매우 작은 경내였지만, 규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경내에 들어선 순간 문수암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템플을 담당하는 보살님에게 템플스테이를 왔다고 말하니, 꽃무늬가 그려진 고무신이 진열되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발사이즈에 맞는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오면 된다고 했다.
운동화에서 고무신으로 갈아 신자 땅의 기운이 느껴졌다. 땅과 가장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고무신. 발은 내 몸 중에서 가장 먼저 템플스테이를 할 준비를 마쳤다.
템플 보살님이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온 나를 보더니 템플스테이용 법복을 준비해서 내가 이틀간 머물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머물 방은 ‘꽃비마당’의 아래층에 위치한 공간이었는데, 화장실을 공용으로 옆방과 써야 한다는 것 외에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화장실을 함께 쓰는 것도 나에게는 전혀 불편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 게스트하우스 생활로 이미 잘 단련되어 있었으니까.
아담하고 단출한 방에 짐을 풀고, 템플 법복으로 갈아입고 경내를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오리엔테이션은 3시 40분에 진행될 예정이어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곳저곳 탐험하듯 경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지리산 옹달샘’이라고 이름 붙은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쉼터에도 들러서 앉아서 책도 읽고, 바람에 나부끼는 풍경 소리를 듣다가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방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지만 잠들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졸음을 꾹꾹 눌러가며 책장을 넘기는 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