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전시 리뷰는 오직 전시의 맥락에서 파악한 내용을 생각해본다. 이번 아이 웨이웨이의 개인전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태도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전시라고 생각한다. 개별적인 작품을 일일이 분석하기보다 전체적으로 설치된 작품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검은 샹들리에>, 2017-2021, 무라노 유리 (앞), <원근법 연구, 1995-2011>, 2014 , 사진 (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검은 샹들리에>
전시장을 처음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작품이 있다. 유리로 만들어진 검은색 샹들리에다. 검은 샹들리에는 사람과 동물의 뼈와 내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뒤섞여 어느 것이 사람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 검게 칠해진 무광 샹들리에는 그냥 보아서는 유리라는 소재를 알 수 없다. 적힌 글을 읽어야 유리임을 인지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또 있다. 이 샹들리에에는 원래 기능인 전구나 초를 켤 수 있는 곳이 없다. '왜 샹들리에는 빛나지 않으며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시가 시작된다.
<원근법 연구>는 작가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랜드마크이자 각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 앞에서 중지를 치켜세우는 사진을 연작으로 보여준다. <한대 도자기 떨어뜨리기>와 <색을 입힌 화병들>은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한나라 시대 유물인 도자기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공업용 페인트에 담갔다 뺀다. 멀리서 보면 알록달록 예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유약을 바르듯 섬세함 없이 마구잡이로 발라져 흐르고 빈 부분이 있어 싸구려같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가치는 숨겨지고 유치해 보인다. 이는 중국의 역사 문화를 다루는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가치와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이뤄진 조급한 현대화, 맹목적인 역사의 우상화 파괴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성찰 없이 이룩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 2015, 벽지 설치, 컬러 프린트, 가변 설치
<옥의>, 2015, 대나무 가변설치
CCTV, 인터넷 소통을 상징하는 작은 새와 수갑, 알파카 문양의 벽지가 전시장 전체를 뒤덮고 있다. 좌대에 설치된 작은 작품들과 거대 옥의 설치물은 물론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들 역시 숨을 곳이 없다. 그 방에서는 어떠한 표현이나 전시를 통한 관객과의 소통마저도 감시당하고 있다. 작품 제목으로 언급한 라마와 알파카를 비교해보자. 이 둘은 구별하기 쉽지 않다. 라마와 알파카의 겉모습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모두 낙타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라마는 사람들에게 일하는 가축으로 키워지며 질 좋은 고기와 섬유까지 공급해주어 다방면으로 쓰인다. 그러나 알파카는 오직 섬유를 위해 길러지는 동물이다. 다양한 종류의 인터넷 소통이 라마처럼 다방면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의 창구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감시 안에서 이뤄지는 소통과 표현은 오직 목적이 하나일 뿐이다. 검열에 통과한 표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얼핏 보면 개인의 표현인 것 같지만 모든 표현은 개인이 아닌 결국 감시체제가 의도한 하나를 위한 표현인 것이다.
옥의(玉衣)는 한나라 시기에 제왕과 귀족들의 수의였다. 옥이 시신을 썩지 않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분을 상징하는 옥으로 수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시장의 옥의는 옥이 아닌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썩어가는 시신을 넣는 자리인 옥의 곳곳은 빛이 난다. 마치 옥의가 조명을 감옥처럼 가둔 것 같다. 이는 위층 유리창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인데 위에서 보면 더욱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샹들리에에서 볼 수 없었던 빛을 이번 전시장의 옥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옥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난다.
<빨래방>, 2016, 가변설치
<이도메니>, 2016, 단채널 비디오, 17분 22초
<빨래방>에 널린 빨래들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지역의 난민캠프에서 수거한 버려진 옷들과 신발들이다. 우리는 흔히 패션을 자기표현의 수단이라고 한다. 개인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옷으로 스스로를 꾸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타낸다. 이 옷들과 신발들은 난민들의 것이다. 난민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이 경계선에서 떠돌며 방향을 잃고 이동해야만 한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사람의 자기표현은 아무리 깨끗하게 세탁하고 반듯하게 다림질을 하더라도 무의미하게 나열될 뿐 쓸쓸해 보인다. 주인을 잃은 빨랫감일 뿐이다. 난민은 그저 비유일 뿐이다. 목적지를 모르는 인간은 난민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다시 전시의 처음과 연결된다. 주인 잃고 남은 옷들은 뼈와 내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샹들리에와 이야기를 상반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나아가야 할 목적이 없는 인간의 자기표현은 쓸모없이 행거에 나열되어 축 늘어질 뿐이다. 샹들리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서 설령 원래 검은 무광 유리라고 하더라도 소재가 유리인지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가 누군지 알아야 무조건 수용하지 않는다. 내가 빛을 반사하고 투영시키는 유리임을 깨달아야 외부환경에 반응할 수 있다. 어떠한 외부환경에도 반사적이지 않고 무조건 흡수하는 검은색인 인간은 반짝반짝 빛나는 촛불로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없다. 외부환경에 반사적으로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동물인지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면 빛나는 정체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빛나는 인간의 정체성은 어떤 빽빽한 감시체제 속에서는 거대한 옥의를 입혀 시체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둬진 정체성이라고 해도 그들의 인간다움은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전시에서 아이 웨이웨이가 말하는 인간이 지켜야 할 미래는 ‘인간다움’인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인간다움을 지킬 때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작가가 꿈꾸는 미래다. 작가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차례다. 당신의 자기표현은 무엇인가? 당신의 정체성은 어떨 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는가? 무엇을 의식하고 어떻게 반사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