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afur Eliasson by JustinWu, Studio Olafur Eliasson
전시 리뷰 - 제 2 전시장
올라퍼 엘리아슨 개인전《새로운 사각지대 안쪽에서 Inside the new blinds spots》설치 전경, 2022, PKM갤러리 제공
Olafur Eliasson,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 Orbital centrifugal presence>, 2022
제 1 전시장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 작품 리뷰다. 제 2 전시장에는 두 가지 유사한 이미지의 벽면 조각과 노란빛을 발산하는 행잉 조각이 있다. 비슷한 두 작품은 변형된 나선형으로 설치된 유리구슬들이다. 각 구슬 면의 절반은 검게 페인트칠되어 있다. 구슬의 각도가 전부 달라 마치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하는 듯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 투명한 유리구슬들은 관람 중인 관람객을 비춘다. 그리고 유리구슬의 검은 면이 넓어질수록 앞에 서 있는 관람객을 비추는 영역이 좁아져 사라진다.
이 벽면 조각들은 <가깝고도 우연한 만남의 궤도>와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다. 두 작품명에 모두 궤도라는 단어가 있다. 이 궤도는 ‘클레리아 곡선(Clelia curve)’이라고 알려진 수학적 형태의 변형이다. 즉, 구의 자오선을 따라 동시에 움직이고 축을 중심으로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점의 진행 과정을 추적한 곡선이다.
올라퍼 엘리아슨이 작품에 클레리아 곡선을 왜 사용했는지 말하기 위해 잠시 기초 지구과학 내용을 적고자 한다. 자오선에 대해 잘 안다면 지루해질 수 있으니 넘기는 편이 좋겠다.
우리는 북극과 남극 사이의 선을 경도 또는 자오선이라고 부른다. 경도와 위도는 도, 분, 초로 측정된다. 위도는 적도에서 멀어지면 각도가 증가하고 둘레는 감소한다. 반면 자오선의 길이는 서로 같아도 등거리가 아니다. 자오선의 거리는 적도에서 최대가 되어 1도에 약 115킬로미터이며 극점에서 제로가 될 때까지 감소한다.
본초자오선이 위치한 영국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 designmate, 유튜브 에듀가이드 [과학동영상-지구과학] 위도와 경도
경도 0˚부터 출발한 동경 180˚와 서경 180˚, designmate, 유튜브 에듀가이드 [과학동영상-지구과학] 위도와 경도
경도의 자오선은 본초자오선으로부터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각도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경도는 경도 0˚로 지정된 본초자오선에서 동쪽으로 180˚에서 서쪽으로 180˚로 측정된다. 동경 180˚와 서경 180˚는 태평양 한가운데 같은 선에서 만난다. 이곳은 달력의 날짜가 바뀌는 곳이며 국제 날짜 변경선이라고도 한다.
국제 날짜 변경선, designmate, 유튜브 에듀가이드 [과학동영상-지구과학] 위도와 경도
지구의 자전, designmate, 유튜브 에듀가이드 [과학동영상-지구과학] 위도와 경도
경도는 어떤 장소의 현지 시각을 쉽게 계산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지구는 약 24시간 만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한다. 1972년 표준 협정 세계시로 바뀌기 전까지 본초자오선은 시간대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자오선을 사용하면 어떤 장소의 모든 시간대를 계산할 수 있다.
자오선, 장헌영, 이상성, 한국천문학회
점이 구의 자오선극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습, mathcurve
따라서 클레리아 곡선의 회전하는 점은 한 개인이 지구상에 서 있는 관측자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우선 관측자의 천정을 중심으로 북극과 남극을 잇는 대원의 자오선이 있다. 그리고 지구는 계속 자전을 하므로 관측자라는 점은 가만히 있어도 회전하는 힘에 따라 운동하는 궤적을 그리게 된다. 이것이 올라퍼 엘리아슨이 모티브로 삼은 구의 회전을 따라 점이 그리는 궤도이다.
Clelia curves, Studio Olafur Eliasson Twitter
Human time is movement (spring, winter, summer)설치 전경, 2019, The Serralv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Human time is movement (winter, summer, spring)설치 전경, 2019, The Serralv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Olafur Eliasson, <Human time is movement (spring)>, 2019, The Serralves Museum of Contemporary Art
관측자로 설정된 위치가 바뀌면 관측자가 보는 하늘이 달라지고 천정과 궤도가 달라진다. 다시 말하여 어디까지나 관측자 관점에서 긋는 선이다. 그래서 움직이는 지구가 있고 개인이 움직이는 동선이 따로 있다. 이 때문에 각자의 시간과 공간은 달라진다.
이것에 대해 표현한 작품이 <Human time is movement> 시리즈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삶의 궤도를 가진다. 그 기준은 관측자 관점인 인간 개인이다. 지구가 회전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계절이 있고 그 계절이라는 사회에 속한 개인은 궤적을 다르게 그린다. 계절로 나누어 각자 그리는 삶의 궤적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궤적이 서로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을 다룬 작품이 이번 전시 제 2전시장에 설치되었던 <가깝고도 우연한 만남의 궤도 Orbital close encounter>와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 Orbital centrifugal presence>이다.
Olafur Eliasson, <가깝고도 우연한 만남의 궤도 Orbital close encounter>, 2022
Olafur Eliasson, <가깝고도 우연한 만남의 궤도 Orbital close encounter>, 2022
Olafur Eliasson, <가깝고도 우연한 만남의 궤도 Orbital close encounter>, 2022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궤도를 그리며 살아간다. 지구에 살고있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중력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나의 궤적을 그리다 보면 다른 궤적을 그리는 타인들과 마주한다. 세계라는 하나의 인간 사회에 살아서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나마 보이는 타인이 거꾸로 보인다. 인간 세계를 벗어난 제3의 존재가 아니라면 타인의 궤도 전체를 비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을 일시적으로만 만나기 때문에 거꾸로 본다. 그 찰나의 순간 마주치는 타인을 제대로 보고 알 수 있겠나. 한 개인이 비춘 타인은 거꾸로 서 있어 틀렸다. 어떤 타인을 몇십 년을 보았대도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없다. 인생이라는 전체 궤적에 비하면 그조차 어느 한 부분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서 갇혀 궤적을 그리며 살기도 바쁘지 않은가.
Olafur Eliasson,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 Orbital centrifugal presence>, 2022, PKM갤러리 제공
Olafur Eliasson,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 Orbital centrifugal presence>, 2022
타인에 대해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은 일시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면 나를 판단하면 되지 않겠나. 나 자신은 스스로 이 궤도와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올라퍼 엘리아슨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가 <밖으로 향하는 궤도의 실재 Orbital centrifugal presence>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자전하는 지구에 의해 우리가 회전하듯 원심력(centrifugal force)에 의한 관성력은 우리의 시선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떤 의지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힘이다. 회전하는 힘에 의해 시선이 바깥방향으로만 향해서 안쪽을 바라보지 못한다. 유리구슬들의 투명한 면은 전부 바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이 이 궤도의 실재다.모든 순간의 시선은 구슬 내부나 궤도 안이 아닌 바깥을 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럼 다시 다음 의문이 문다. 모든 타인이 나를 왜곡된 채 바라보고 나의 시선은 밖으로만 향한다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올라퍼 엘리아슨은 이 질문의 힌트를 제 1전시장에서 미리 언급했다. 인식하는 유기체인 인간은 바깥 현상을 통해서 렌즈 플레어 현상이라는 가치관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인식 구조를 지닌 인간은 이 방법 외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인 자신조차도 이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과정은 나를 렌즈 플레어 현상에 투과시켜 인식하는 방법이다.
이 도구는 지닌 본인 외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인 유리구슬은 나를 한 겹의 반사면으로 비춘다. 그들이 비추고 싶은 모습으로 비추어 좋든 나쁘든 단순한 선입견으로만 투영된다. 그래서 타인인 너는 나를 절대 모른다. 네가 안다고 자부하는 모습은 나의 찰나의 순간이다. 그러나 렌즈 플레어 현상에 비춰본 나는 복합적이다. 타인의 성의 없는 단면의 반사가 아니라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종합적이다. 그런 가치관의 통합으로 비춰진 것이 나 자신이다.
제 2 전시장은 모든 인간의 운명인 궤도를 그리며 살아가기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타인과 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왜 인식의 추구는 바깥을 향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자전하는 지구라는 곳에 있는 나는 중력에 의해 인간 사회에 속해져 궤도를 그리며 살고 있다. 누구나 다른 궤도를 지니고 있고 타인과 나는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순간은 너무나도 찰나여서 인간은 서로를 절대 모른다. 너와 내가 아는 것은 어느 일부분이다. 또한 궤도 때문에 원심력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나의 의식은 외부를 향하게 된다. 모든 시선과 인식은 외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알아내는 것조차 밖으로 보아야 보인다. 인간은 주체적인 행동을 추구하며 주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의식 역시 내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작품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당연시되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이끈다. 이 전시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