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화창했던 날, 사기를 당했다

사회초년생의 신고식

by 판타

화창한 봄날 환절기 감기처럼

걱정 하나 없던 날, 나는 사기를 당했다.


근무 약사로 3년을 보내며 사회초년생티를 벗어갈 즈음

나는 돈을 더 벌어야겠다 결심하고 기존에 있던 한 약국을 인수했다.

생전 만져보지도 못했던 큰돈을 대출해야 했기에 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튼튼한 돌다리를 몇 번이나 두들겨 가며 무사히 거래를 마쳤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영업 중이었던 약국이었기에, 문을 열자마자 돈이 벌렸다.

초반에 벌어들인 수입들은 약재고 사입과 대출금 원리금으로 빠져나가 통장 잔고는 제자리걸음이었지만 이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자 자신감도 차올랐다.

그리고 서서히 곤두섰던 신경도 누그러지며,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치 삶에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봄은 봄바람을 불고 왔다.

친절한 얼굴로 갖가지 혜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것들이 마치 나를 위한 특별한 서비스처럼 느껴졌다.

나는 좋은 기회는 항상 먼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사람은 여유로우면 경계심이 무너진다.

봄, 가을의 따스한 햇볕, 청명한 하늘에 커다란 일교차를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나서는 것처럼 말이다.

감기는 그렇게 온다.

사기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사기꾼을 알아보지 못했다.


친절한 말투, 따듯한 표정을 한 그들은 잘 꾸며진 팸플릿과 서류를 들고 왔다.

사기꾼들은 저렴한 금액을 내면 리조트와 펜션 등기를 넘겨주겠다고 말했다.

당장이라도 그것들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곧장 돌려보냈겠지만,

그 순간의 나와 가족들이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사기꾼들이 미리 작업해놓은 인터넷 뉴스 기사는 그들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서류에 사인하고 홀린 듯 수 백만 원을 입금한 뒤였다.


돈을 입금받은 사기꾼이 서류를 들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사라졌다.

나는 신이나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남편은 사기 아니냐며 걱정했고,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꾼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펜션을 이용해보라 했다.

그래서 우선 그들이 말하는 펜션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다행히 펜션은 그들이 말한 장소에 있었다.

뭔가 고즈넉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실물을 확인한 순간 나의 경계심은 한껏 누그러졌다.

우리 가족은 사기꾼들의 펜션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나는 환절기에 감기에 걸리는 줄 모르고 놀 듯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문제는 시작됐다.

오한이 들 듯, 나는 뭔가 싸함을 느꼈다.

사기꾼들이 약속한 등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을 전화해봐도, 곧 진행될 거라며 안심하라는 말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스 기사를 다시 열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댓글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봤다.

눈앞이 아찔했다. 댓글에는 나처럼 속았다는 사람들의 울분과 좌절이 남겨져 있었다.

그제야 봄날의 감기처럼 스며든 이 사기가 현실이 되었다.


다시 사기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문자로 자신은 일을 그만두었으니, 대표에게 전화해보라 했다.

부랴부랴 문자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니, 대표라는 사람은 구체적인 시간과 날짜를 언급하며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안도했다.

하지만 대표는 입금하지 않았다.


입금 시기를 지정하고 기다리게 만든 후, 말을 번복하는 것이 몇 차례나 반복됐다.

차라리 돈이 없으니 배 째라고 나오면 포기라도 할 텐데

지킬 생각도 없는 약속을 기다리느라 계속 신경이 쓰이고,

무시당하는 듯해 화가 치밀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괴로웠다.

남편은 나의 하루하루가 그놈들로 인해 망치는 것이 아깝다며 자신이 대신 돈 줄 테니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다.

나도 그 정도 액수가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는 순간 지는 기분이 들었고,

나 때문에 남편이 손해를 보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그래서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야 했다.

나는 애써 차분해지려 노력하며, 그들에 관한 기사나 서류 등을 살펴보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우선 법인이라 그대로 폐업하고 도망가면 끝일 텐데, 왜 계속 내 전화를 받으며 시간을 끌었는지를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놀러 갔던 펜션의 상태가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기 초기였음을 확신했다.


남의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도 자신의 돈은 아까울 것이기에,

자신들이 투자한 돈 이상을 뽑고 싶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사기가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게,

앞서 당한 피해자들을 어떻게든 구워삶고 싶어라 할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돈은 돌려주는 척이라도 하겠지 싶어서,

뒤에서 피해자들과 공론화를 위한 자료를 모으며

대표에게는 수시로 전화해서 친절한 말투로 어르고 달랬다가 협박을 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사기 치느라 바쁘실 그 나쁜 놈이 문득 생각날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했다.


그랬더니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 100만 원씩, 50만 원씩 나눠 입금해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들러붙어 있던 가래가 묽어지듯,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거의 모든 금액을 받아냈다.

대표와의 마지막 통화는 얼마 남았냐는 말에 30만 원 남았다는 이야기를 한 참이었다.

알겠다며 전화를 끊은 그는 더는 어떠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도 초반에 그들의 펜션을 3번이나 이용했으므로, 30만 원은 그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드디어, 기침처럼 터져 나오던 화는 그렇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내게 찾아온 지독한 기침 감기와 같았다.

목에 걸린 가래처럼 끈적이고, 터져 나오는 기침처럼 고통스러웠다.


기침을 멎게 하려면 크게 2가지 전략이 있다.

첫 번째는 기침 반사를 일으키는 중추신경이나, 자극 자체를 전달하지 못하게 말초신경을 차단하는 전략이다.

아무리 사기꾼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내가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면 해결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택했다.

두 번째 전략인 가래를 묽게 해, 원인 자체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최대한 피해액을 받아내, 원인을 제거하면 되는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피해액 정도가 크면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남편은 전자를 제안했고,

나는 후자를 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돈도, 평온도 되찾았다.

사회초년생이 맞이한 인생의 봄날은 그렇게 지독한 기침 감기를 앓고 지나갔다.


사회의 쓴맛을 맛본 나는 조금 더 조심성 높은 어른이 되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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