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주는 사람은 AI로 대체될 수 없다

by 환희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구와 신의 격변의 시기를 모두 경험한 세대이다.

예를 들어, 국민학교 3년과 초등학교 3년, 유학 초기에 국제전화 전용 유선 전화기로 프랑스 기숙사에서 다른 한국 유학생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내 전화를 이용해 한국에 안부 전화를 걸었다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20살 초반에 했던 일련의 해외여행에서 나는 종이지도를 펼치며 다녔다. 여행책에 부록처럼 끼워져 있는 각 도시의 핫한 동네 지도를 잘라가서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가며 요긴하게 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MZ세대의 이론적 정의에 껴 맞춘다면 나도 MZ라지만, 실상 요즘 젊은 친구들은ㅡ 이라며 말을 떼고 필요할 땐 젊은 사람 편에 서는 어정쩡한 축에 기대어 살고 있다


서울에서 아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고 주로 손으로 직접 물성을 느끼며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이 외에도 예술치료사로 대학병원에서 일하며 매주 그룹 세션을 진행하고 있다.

매주 5살 아이부터 70-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작업하며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선생님 연필 자국이 남아요'
'마음처럼 안 그려져요'

모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이 당연한 사실을 하나같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이 하나 있는데, 노트북에서 수업 자료를 보여줄 때, 참지 못하고 노트북 화면을 검지손가락으로 터치하며 스크롤한다. '터치스크린 아니야 이거'라고 말해도 노트북을 닫을 때까지 같은 제스처를 반복하며 '아 아니랬지' 한다.


종이에 연필을 긋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흔적을 남긴다. 긋기 전, 아무 흔적도 없던 때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아이들은 열심히 지우개질을 한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흔적은 남고 아이들 대부분이 그걸 납득하기 힘들어해서 나한테 최대한 말끔하게 지워주길 요구하지만, 내가 아무리 박박 지워도 그었던 흔적은 희미하게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선을 하나 그을 때도 신중해야 하고, 선이 남는 게 싫다면 힘 조절이나 연필의 경도를 골라서 쓰는 수고로움을 더해야 한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진짜 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되돌리기' '삭제' '새로고침' 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예술 창작 수업은
앞에 앉은 사람을 마주하고 잠자코 기다려주는 것에서 시작해
그의 작업을 고요하게 지지하고
마무리까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에서 끝이 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최근 챗gpt를 쓰며 느낀 건데, AI와의 대화에는 쉼표가 없다. 대화 도중 '흠' 하며 숨만 쉬어도 0.1초 만에 '그렇구나' '그렇다면'이라며 자꾸만 공백을 메운다. 거기에서 AI의 가벼움이 느껴졌다.

AI가 그 누구보다도 힘을 북돋아 주는 말을 건네고, 수많은 해결책을 그럴듯하게 내놓은들 대화 사이의 행간을 읽거나 진심으로 상대를 헤아려 그가 한숨을 쉬고 말을 고르는 동안 진정으로 그를 기다리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람인 나도 작업대 맞은편의 상대가 한참을 서성이거나 가만히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질 때면 속으로 수 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갈등을 겪는다. "이렇게까지 기다려줬는데, 지금 쯤은 개입해도 돼.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보자. 아니야. 정말 10초만 더 참아볼까. 입을 떼려고도 하는 것 같아. 색을 고르려고 손을 뻗을 것도 같아."


기다림에는 굉장히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저마다의 속도가 다르듯, 그 속도를, 나아가선 당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준다. 우리는 작업대 위에 흙과 연필, 종이, 물감 등 다양한 창작 도구를 마주하고 있다. 당신에게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것들이 섞여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들을 가르쳐서 세상이 알아주는 그럴싸한 뭔가를 만들라고 요구하지 않을 거다. 그런 것들을 오히려 좀 내려놓고 순수하게 작업의 즐거움으로 당신을 이끌어 주려고 한다.


정말이다. 저게 매 수업을 대하는 나의 진심인데, 저걸 말이 아닌 눈빛과 그를 지지하는 태도에서만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도 부지기수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한 번의 경험들이 마음에 쌓이는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업종료 D-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