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집’이다. 태어나서 내가 자리한 곳.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렇다면 ‘내 방’과 ‘내 물건’이 있고 가족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 집이 되는가?
내가 프랑스를 떠나오기 전 살면서 처음 주소가 없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는 대문 벨과 우체통 사서함에 호수가 아닌 사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어서 난 친구 집 거실 한켠에 중고 소파를 구해 얹혀살면서도 아무 데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어 사실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을 구하려고 해도 거주지 증명을 해야 했기에 집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주소를 빌려 달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프랑스 시절엔 어느 순간부터 ‘이 곳이 내 집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의 동화랄까. 그리워할 곳, 돌아갈 곳을 두지 않고 살았다. 외국에 살며 만난 사람들 중 짧은 시간 유학을 했던 수십 년을 살고 계신 분들 이건 떠나온 곳을 영영 그리워하며 몸만 거기 둘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외국인인지라 ‘어디에서 왔냐’고 물을 때가 있다. 외국인에게 묻는 경우는 origine 즉 내가 떠나온 곳인 거고, 그들 사이에서는 그전에 살았던 지역을 묻는 거다. 종종 다른 지역에서 온 프랑스 사람들이 길을 물을 때 내가 그곳에 완전히 속한 분위기를 풍기니까 아무렇지 않게 길을 물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곳’ 사람이라면 아는 길을 대답해 주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사람이 아니어서’ 혹은 ‘내가 여기 속하지 않아서(살지 않아서) “Je ne suis pas dans ce coin”라고 대답한다.
반면 지금 사는 파주에 대해서 ‘파주는 어때요?’ ‘거긴 어때요?’라고 물으면 난 거의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아직 파주를 집으로 인식하지 않아서일까. 그저 주소를 둔 곳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닐는지.
프랑스를 떠나오기 전 다시 주소를 얻게 되고 익숙한 사람과 다시 함께이게 됐을 때 실상은 나는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피난처(Abri)가 생겼지만 그곳의 그 어떤 요소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집을 채운 자잘한 물건들은 내 것이 훨씬 많았지만 그가 산 침대 매트리스와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든 침대 등받이, 거실 한 벽을 차지한 원목 책장 그리고 그의 엄마네 창고에서 가져온 아빠가 쓰던 가족의 역사가 있는 식탁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나는 이 집에서 내 것은 거의 없다고 느꼈다. 그가 했던 ‘여긴 집세가 너무 비싸. 우리는 이 집에서 곧 나가야 해’라는 말은 내게 너무 가혹했는데 나는 이 집이 새로운 시작이자 마지막 보루였고 더 이상은 밀려날 곳이 없었는데 반해 그는 엄마 집이든 적어도 이 나라가 그의 나라이니 언제든 ‘다른 집’을 구하면 됐지만 나는 돌아갈 곳을 상정해두지 않았던 터였다. 며칠의 고민 끝에 나는 ‘한국에 가야 할 것 같아’라고 가족에게 알렸다.
그것은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을 정해서 그곳까지 밀려난 것에 가까웠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사이 entre-deux에 산다고 생각 들었다. 모든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냈기에 나는 완전히 프랑스에 속할 수 없었다. 신기했던 건 프랑스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거다. 이제니 시인이 쓴 ‘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처럼 집이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프랑스)와 모국(말, 미디어와 책을 통해 접하는 언어, 가족) 두 세계는 엄연히 동시에 존재했다. 그런 면에서 두 세계를 사는 것 자체가 외상의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 든다. 나는 때에 따라 나의 자리를 다시 배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오는 혼란과 외로움, 배제, 이제야 이 곳에 속했다고 정한 순간 생각지 못하게 들어오는 인종차별,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 이방인으로서의 한계, 숙명 같은 것들이 있었다.
떠나온 곳과 돌아온 곳이 그럼 항상 일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럼 ‘집’의 기준은 뭘까?
나는 파주 집에서 항상 갈 곳을 잃었다. 나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했다. 책은 어디서 읽어야 하나, 어떤 자세로 어느 구석에서 쉬어야 하나. 차츰 시간이 지나며 읽는 책 여러 권을 바닥, 식탁, 책상, 소파 위, 침대맡 등 여러 곳에 두고 엄마한테 꾸지람을 들으면서 집 안에서의 내 영역을 만들어갔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해 오던 의식 같은 것이 있는데 공간을 냄새로 채우는 것이다. 이른 아침 아직 집의 다른 구성원이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때 커피나 차, 향을 공간에 입힌다. 거기에 언제고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다면 나의 집이 완성된다.
언젠가 '나에게 집이 돼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고 얘기한 지인의 말이 오래 맴돈다. 그러고 보면 집은 물리적 공간인 건가 아니면 그곳을 채우는 사람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