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살기
프랑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5년을 경기도 신도시 주민으로 살았고 그간 그림과 사진, 도자기, 꽃으로 한 번의 그룹전과 두 번의 개인전을 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창작 작업이 생계 수단이 된 적은 없고 한국에서 예술인 등록증을 신청했었지만 이런 띄엄띄엄 활동으로는 본업 예술가로 인정해 줄 수 없다며 거절당했었다. 순순히 수긍해야만 했다. 내 주변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예술가 친구들이 있지만 모두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며 계속해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해 나가는 노력을 하며 살았다. 본업 예술가를 유지하기 위해 ‘논술 선생님’ ‘입시 강사’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생’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삶이라니.
그런데 최근 내 예술가 친구들이 선언했다. 본업이 시인이고 예술가인 삶을 살겠다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돈과 시간, 체력은 정해져 있기에 일단 순수 창작 활동이 아닌 다른 돈벌이 수단이 되는 일의 시급을 정했다. 시간당 이 돈을 주지 않는다면 창작을 제외한 다른 부수적인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지 안다. 얼마나 필요한 선택인지도. 그들은 그들의 예술에 한 번 인생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예술대학 석사를 졸업하고 서른 살에 꽃 학교를 다닐 때, 예술학교 동문 프랑스 친구들과 각자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뭘 하고 지내느냐고.
나는 꽃을 하고 있었고, 어떤 친구는 유리공예를 깊이 있게 배우고 있었고, 어떤 친구는 은 세공을 하고 있었다.
“파니 네가 앞으로 뭐가 될지 궁금하다” 고 했다.
거기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가지려는 거냐, 돈은 얼마나 버는 거냐? 같은 흔한 오지랖이나 걱정 대신 오직 나라는 사람을 믿어주고 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지지하는 마음뿐이었다.
내 부모에게도 언제 마지막으로 저 말을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서른에 들은 저 말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나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선생님‘으로 불린다. 그곳에선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예술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한 이력이 있는 예술가 프로필과, 아이들부터 청년, 성인 수업을 해 온 예술교육가, 꽃 작업을 하는 플로리스트, 거기에 최근 2년 간 매진해 온 도예 작업 이력서까지 더해져 상대의 니즈에 맞춰 적절한 이력서를 꺼내 보였다.
내가 가장 최근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꺼낸 건 일본 여행 갈 때 비행기 안에서 썼던 입국신고서에서였다. 여기서만큼은 나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