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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Jan 18. 2021

예언자의 나라

해리 터틀로브라는 작가가 있다. 주로 역사적 사실에 가정법을 발동시켜 비트는 대체역사소설을 쓴다. 만약 A가 아니라 B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라는 게 그의 상상력의 출발이다. <비잔티움의 첩자>는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그는 동로마제국에 거주하는 아랍인으로 그리스 정교회 신자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이슬람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히스파니아의 주교에 오를 정도로 신실한 주님의 사도이다. 


오 그럼 최소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지긋지긋한 전쟁은 없겠네?

라고 기대하나? 

그럼 무함마드의 역할은? 

뭔가 흥미로운 게 나오겠지?      

천만에, 유럽 기독교와 아랍 기독교가  싸운다. 


너무 허탈하지 않은가. 역사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지 15년 만에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395)되었고 451년에 그리스 정교회로 교회까지 완전히 분리되었다.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전쟁까지 불사했으니 무함마드만 빼면 대체 소설이라고 하기도 힘든 전개다. 인간은 어쨋든 싸운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면  딱히 반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허탈한 것도 사실이다. 너무 뻔하니까. 

        

이런 소설들은 대개 비슷하다. 결국은 우리가 아는 역사와 다를 게 없는 결과로 이어지며 절망적으로 끝난다. 영화 혹성탈출의 엔딩처럼 죽어라 도망친 그곳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말이다. 역사는 그렇게 필연으로 남는다.      


오해와 이해      


이슬람교는 근본주의의 끝판 ISIS 때문에 더욱더 폭력적인 이미지로 부각된다. 애초에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시작부터 무시무시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서구의 편견이며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광대한 지역의 정복민들을 포용적으로 통치했고 융합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세상 일이란 대개 그렇듯이 포교와 정복, 통치방식과 종교적 규범 등은 시기적으로 상황에 따라 달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기독교 문명도 그랬고, 현재의 이슬람 국가들 간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이런 거다. 유대교 랍비들은 유대교를 괴상하게 변형시켜 떠드는 이 아랍인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교리 논쟁이 벌어졌는데 무함마드는 딱히 배움이 있거나 유대교의 교리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 조목조목 논파당했다. 이전까지 무함마드는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 논쟁 이후로 그들을 사악한 이교도로 간주하고 투쟁을 명령한다. 아직 세력이 없던 초기의 쿠란은 포용과 관용을 말하지만 헤지라 이후 아라비아의 통치자가 된 강자 무함마드의 계시는 달라진 것이다.  지금 가톨릭이 평화적인 건 세속의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던 시절의 무시무시함이란.    

 

코란의 첫 구절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예언자이며, 더 이상 예언자는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신의 말을 전한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말을 전하는 하디스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무함마드가 말했다고 전하는 내용이 일종의 행동강령으로 작동했다. 상황에 따라 감정적이거나 즉흥적인 발언들도 하디스가 되었고 실제로 이슬람의 역사를 만들었다. 사후에는 어중이떠중이까지 나타나 해괴한 하디스를 전했다. ISIS는 바로 이 하디스를 근거로 행동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슬람은 자연인 무함마드의 불완전한 삶 위에서 세워진 제국이다.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지만 자신을 반대하고 핍박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한다. 평화롭게 살던 유대인 마을에 신세를 졌으면서도 필요하면 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았던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잔혹하고 이기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찬 문제적 인간이었다. 이것은 인간이니 당연할 뿐 아니라 무함마드의 지적 도덕적 수준은 그냥 그 시대 평균으로 보인다. 진정한 리스크는 그를 무오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구조에 있을 것이다. (무함마드의 전기를 쓰는 것조차 교리에 어긋나 드물긴 하지만 <무함마드 평전>은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무함마드와 근본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두 권의 책이 있다. ) 


독선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도 쌍벽을 이루지 않는가. 하물며 누가 더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는 우열을 가리기도 힘들다. 어차피 종교와 권력이 저지른 살육의 기나긴 연대기는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사람이 가축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시대였으니까. 그래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만행에 기댄 폭력성 논쟁은 차별적 시선이 깔려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는 점만 인정한다면 아마 조금은 더 평화로왔을 것이다. (물론 종교의 영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게 문제)       


무함마드의 삶은 자연인으로든 예언자로든 그리스도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넓게 보아서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고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빛으로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부터 그렇다.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 알라신의 계시를 전한 지브릴이 성경에도 등장하는 가브리엘 천사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한 지역의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에서 출발한 종교들이다. 두 사람이 신의 계시를 말로 전하면 제자들이 기록해서 쿠란과 성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메카의 상인들에게 꽤 큰 수입원인 성지순례를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막았던 일도 유사하다. 그리스도가 유대교나 성전의 상인들에게 분노한 것도 그들이 하느님을 팔아 이익을 챙기며 그릇된 믿음을 전한다는 이유에서다. 두 사람은  종교가 큰 사업이던 이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그리스도를 직접 완전하게 처형했다. 무함마드는 이 일로 도시의 질서를 해치고 이단을 전파한다고 몰려 죽을 뻔했는데 간신히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한다. 신의 아들은 커녕 유일한 예언자로서 특별한 지위조차 거부하고 초상화를 금지시키는 건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얼굴은 흰색이나 빛으로 표현된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비난했으면서도 무함마드의 사망 후에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지 않을까 며칠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슬람 공동체의 탄생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두 제국의 오랜 전쟁과 여러 부족 간의 내전으로 활발한 무역로였던 육해상 실크로드는 막혔다. 상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하는 우회 루트를 이용했다. 메카와 메디나는 그 대상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극소수의 거상들 외에는 대다수가 노예, 노예나 다름없는 해방노예, 뜨내기 외국인, 가난한 장인들, 고아와 과부들 천지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앞에 알라신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나타난다. 메카에서 쫓겨났다가 힘을 길러 메디나로 옮기고, 이슬람 공동체가 커지자 그 힘으로 다시 메카를 무혈 정복한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부족 학살, 대상들 약탈을 명령한다. 이를 최초의 지하드(성전)라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10여 년 동안 80번의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632~754 이슬람 제국의 영토 @wiki

10년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치하의 시리아, 사산조 페르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한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강제개종이 불필요할 정도로 환영받았다고 한다. 적은 세금으로 보호를 약속하고 신정일치의 강력한 통치로 부족을 통일하며 안정을 가져왔다. 평등과 평화, 개혁의 기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깃발이 되었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은 부족 합의제 방식으로 후계자 칼리파를 선출한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가계가 우선이었다. 무함마드는 한참 혼기가 지난 25세에 40세의 성공한 사업가 카디자와 결혼했는데 직계 후손은 남기지 않았다. 카디자의 아버지, 무함마드의 장인이 1대 칼리파가 된다. 이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로 초기 4인의 통치기를 정통 칼리파 시대라고 한다.  



1400년 분열의 씨앗      


711년 새로운 칼리파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등극한다.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이에 반대하고 알리를 암살한다. 알리의 추종세력은 이에 저항하며 시아파로 결집한다. 무아위야파는 이슬람 교리에 의하면 모두가 평등하니 무함마드의 가계라는 신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자신들이 정통 이슬람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슬람 건국에 함께 한 수많은 세력들이 혈연관계보다 다수인데 최고 권력을 빼앗길 수 없었던 세속적인 이유가 더 크다. 무아위야파는 시아파를 분파, 이단으로 탄압하고 학살한다. 1400년 동안 이어진 이슬람 분열의 시작이다.      

현재의 이슬람권  진한 녹색이 시아파로 이란과 남부 이라크 외에는 대부분 수니파 국가들이다. 

물론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의 90%에 달하는 절대다수라 세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언제나 이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시한폭탄이다. 수니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갔고, 시아파는 고립되어 점점 근본주의화 되었다. 이슬람의 종교지도자인 이맘의 지위도 두 파 간에 완전히 달라진다. 수니파의 이맘은 종교의례의 집행자에 불과하지만, 시아파의 이맘은 예언자의 수준으로 절대적이고 강력하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바로 시아파의 이맘이다.      


이들의 반목과 원한은 국경과 인종, 심지어 종교도 초월한다. 호메이니는 근본주의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왕조인 팔레비 국왕을 축출했다. 1979년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인질 사건을 벌여 카터 대통령의 낙선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원해서 이란을 침공한다. 참고로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인데 후세인은 수니파이다. 서방 언론은 1400년의 반목이 폭발했다고 보도했지만, 아랍의 종교, 부족 간의 깊은 갈등은 언제나 서방 국가들에 이용되곤 했다. 
미국이 뒤에 있는 이 전쟁은 무려 8년 동안 100만 명이 사망하고 휴전으로 끝났다. 이란은 반서방국가가 되어 악의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경제제재를 당한다. 하지만 수니파가 주축인 IS가 등장하자 모든 것이 달라진다. IS는 시아파를 이단자로 간주, 무차별 학살한다. 이란은 IS를 증오하여 이라크 등에 지상군을 투입하고 쿠르드군과 함께 IS 소탕의 주력으로 싸웠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서방은 이란 제재를 풀고 화해 무드가 만들어진다. 이제는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와 석유문제로 새로운 긴장이 시작되고 있다.      


정복, 정복, 정복     


수니파가 아무리 다수라지만 무함마드 사후 70년 동안의 칼리파 시대를 끝낸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성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아파의 반발과 그에 따른 탄압은 격화되고 내분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왕조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비잔틴 치하에서 탈환한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언제나 내부의 적은 외부의 더 큰 적으로 막는 법이다.       


무엇보다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 목축업이 침체되어 생존이 위태로웠다. 비옥한 경작지와 새로운 이주지, 그리고 안정된 교역로 확보가 절실했다. 정복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전선은 서쪽으로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동쪽으로 당나라 접경지역까지 펼쳐졌다.  남쪽으로는 동부 지중해를 차지하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했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과 무어인들이 주력인 이슬람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다.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 천정의  들소와 수십 마리의 동물 그림 선사시대에  드로잉의 천재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만 오천 년 전 최초의 현생 인류 크로마뇽인이 동굴 벽에 아름다운 들소 그림을 남긴 곳, 대서양과 지중해에 둘러싸인 유럽의 끝자락, 이베리아족, 켈트족이 살았고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반달족과 서고트족까지 수많은 부족들이 거쳐간 이 곳에 유럽의 이슬람 알 안달루시아의 시대가 시작된다.     


유럽인들은 이제 지중해에 배 한 척도 띄울 수 없게 되었다.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던 지중해 시대가 막을 내렸다. 유럽은 봉쇄되었다. 이슬람에 포위되어 갇힌 유럽은 정체된 채 농경산업에만 의존했다. 프랑크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고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될 정도로 그 여파는 컸다.    

719년의 알 안달루시아 -서고트인들은 북쪽 끝으로 도망쳐 와신상담에 들어간다 

이슬람은 기세를 몰아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유럽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에 의해 저지당했다. 기독교 국가는 첫 승리를 거뒀다. 교황은 이슬람에 쫓겨난 서고트 인들을 지원하며 저항의 불씨를 붙였다.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는 <신의 용광로>에서 이때 차라리 패배하는 게 유럽에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만큼 당시의 유럽은 후진적이었고 이후의 발전이 더뎠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초기지가 된 이베리아 반도는 번영을 구가했다. 그들은 게르만이 쓸어버려 한없이 무식해진 유럽에 고대의 지적 유산을 전해준 유일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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