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족은 발렌스 황제와 협상하는 척 하며 시간을 벌었다. 로마군대는 전멸하고 황제 본인도 전사했다. @akg-images.com
그들은 야만인으로 불렸지만 고딕이라는 한 시대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전투력이 대단한 건 틀림없으나 로마의 심장을 유린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1434년, 스웨덴과 스페인이 난데없이 각자 고트족의 적통성을 주장한 일이 있다. 스웨덴은 고트족의 원래 고향이 자신들의 예틀란드라고 주장했다. 스페인은 무슨 근거일까?
고트족의 행방
410. 서고트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재물을 약탈하는 서고트족 /The Sac of Rome 15C.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삽화.
하드리아노 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들은 동고트와 서고트로 나뉘어 세력을 넓혔다. (원래 이름은 지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서고트의 알라리크는 로마를 습격했다. 그들은 반달족보다 더 극심하게 로마를 약탈했다. 반달족도 무자비했지만 최소한 로마를 초토화시키지는 않았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동로마 황제 제논은 동고트를 지원해서 오도아케르를 물리쳤다. 동고트는 이탈리아 본토를 통일하고 동고트왕국을 세웠다. 210년에 100만 명 이상이던 로마시의 인구는 고딕 전쟁 (535–554년) 이후 35,000명으로 감소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토사구팽일까. 동로마제국은 553년 동고트왕국을 정복했다. 포로가 된 동고트인들은 동로마제국의 군인으로 합류했다. 특히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했을 때 로마의 영토와 문화를 지켰다. 그들은 어쨌든 로마제국의 일원이 된 셈이다.
서고트의 무대는 서쪽, 남서 프랑스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507년 또 다른 게르만 부족인 프랑크족 클로비스에게 대패해서 프랑스 영토에서 쫓겨났다. 프랑스의 시조인 프랑크왕국 메로빙거 왕조가 이렇게 시작되고 서고트는 이베리아 반도로 밀려나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711년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면서 멸망한 후 그들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망쳐 피레네 산맥 아래에서 이런저런 왕국을 세워 연명했다. 아스트리아스왕국은 서고트의 귀족 펠라지우스가 세운 나라이다. 그는 훗날의 스페인 영토 회복운동, 즉 레콩키스타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에서 이슬람에게 승리한 국가적 영웅이다. 800년 후 이슬람을 물리치고 스페인왕국을 세웠을 때 자신들이 고트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523년 동서 고트족과 부르군트족, 반달족의 위치
711년 이슬람의 이베리아 정복으로 쫓겨나 스페인 북부로 간 서고트. 여기 살고 있던 바스크족은 소수민족이 되었다.
즉, 고트족 주류 중 일부는 이탈리아와 동로마에, 일부는 스페인으로 이동한 것이다. 프랑스의 프랑크족도 게르만 일족이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고트족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최전선에서 싸워 기독교를 지켜낸 주역이 된다. 이탈리아 반도의 고트족은 로마의 본류를 지킨 셈이고 프랑크족은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그뿐인가. 게르만의 색슨족은 5세기에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10세기에 바이킹들의 신 오딘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냈다. 그리고 바이킹들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뒤 기독교도가 되었다.
데인족의 침략도 @history war.co.uk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로 바이킹스와 라스트 킹덤이 있다. 각각 바이킹과 색슨이 주인공인 드라마라 같이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폭력 수위가 높긴 하지만 나름 고증에 충실하면서 픽션을 잘 결합시켜 완성도가 높다. 서로가 신의 이름으로 무시무시한 살육을 벌이는 드라마들이다. 바이킹스에서 상대의 신에 대해 서로 조롱과 비난을 일삼지만 그 신에 대한 호기심 역시 진지하게 다루고 때아닌 신학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흥미롭다.)
데인족을 막아내는 알프레드 대왕(드라마 라스트 킹덤의 그랜드 마스터. 본인의 업적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장면이 드라마에도 나온다.)@explore-parliament.net
심지어 800년에는 게르만의 태생지인 중부 유럽을 포함하여 신성로마제국을 세우기까지 한다. 독일, 보헤미아, 부르군트, 이탈리아의 독일계 다민족 국가를 포함하는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선언한 것이다. 교황은 프랑크 왕 샤를 1세를 제국의 황제로 임명할 정도로 종교의 우위를 과시했다. 제국의 정통성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기독교가 유럽을 묶는 유일한 가치가 된 것이다.
(앞에서 중세 말기, 스페인이 고트족의 적통임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더이상 부끄러운 야만족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것이다. 야만의 상징은 반달족에게 다 몰아줬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유럽의 왕가는 결혼 동맹으로 맺어지고 끊임없는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된다. 조금 더 나가보면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는 18~19세기 유럽 왕실의 종가나 다름없다. 심지어 20세기 초 군주제가 몰락할 때 유럽의 거의 모든 왕실이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이었다. 지금의 영국 왕실도 원래 성은 작센-고타였다. 2차 대전 때 독일 색을 지우기 위해 서둘러 윈저로 개명한 것이다. 심지어 로마제국의 이미지를 차용하며 아리안의 위대함을 부르짖은 히틀러는 말해 무엇하랴.
고대로마의 철십자 fibula(브로치)@ istockphoto.com
고대 로마 철십자 브론즈
로마바라기를 느끼게 하는 동고트의 eagle fibula
기독교와 봉건제의 수호자
고트족은 이렇게 중세 초기 유럽의 곳곳에 흩어져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영주에게 복종하고 영토를 지키는 전문 무관 계급, 즉 기사의 원형이 되었다.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이교도 민족들 중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이들은 사실 유럽의 핵심세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아래에서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독교의 권위를 지킬수록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원래 살고 있던 정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슬람은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국가를 통치했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처참한 희생을 치렀다. 로마는 박해자이면서 수호자가 되었고 뒤이어 게르만 역시 로마와 기독교를 모두 계승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지켰다. 태생부터 신정 분리였던 기독교는 왕권과의 긴장 관계를 피할 수 없었다. 시작은 전혀 다른 두 종교가 결국 유일신의 이름으로 세속의 권력을 취한 것은 같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뿌리를 같이 한다. 하느님이 그들의 유일신이다. 성경의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은 얼마나 잔혹하며 무자비한가. 하지만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로서 사랑과 자비를 말하며 유대교의 하느님을 재해석했다. 신약의 삼위일체는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스도를 말하며 가톨릭 대성당의 메인 아이콘이다. 모세가 우상숭배에 저주를 퍼부었던 걸 생각하면 유대인에게 기독교는 또 다른 우상숭배이자 신을 참칭하는 배신자이며 기독교도에게 유대인은 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이때 이미 시작된 것인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는 기묘한 삼각관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은 기독교 최고의 성지가 되었고,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점령당하자 그 성지를 동방의 이교도에게서 탈환하겠다고 나선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다.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이 행한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사례로 단연 으뜸이다.)
진짜 예수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 @nationalgeographic
예수의 무덤이 발견된 장소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묘교회인데 이 곳은 무려 여섯 종파가 관리하고 있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계단과 계단 아래의 관리자가 다른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