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민재가 휴대폰으로 한 노래를 틀었다. 낯익은 멜로디이지만 어떤 노래인지 몰랐던 딱 그런 노래였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제목의 노래란 걸 민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는데.. 나오는 영상과 멜로디가 왠지 나를 그 노래를 처음 접했던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데려다 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내가 느끼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 내용이었지만, 맑고 청아한 멜로디의 동요였고, 그 동요를 듣고 이야기하는 민재의 눈동자 또한 맑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밝고 유쾌했다.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죽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밝게 받아들이는구나..'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이 바뀐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민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먼 훗날 나의 죽음 뒤에 누군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렇게 밝게 웃으며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어둡고, 말하기 꺼려지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 뒤에 그 존재는 정말 입에서 사라지고.. 결국 마음에서도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졌을 이 동요처럼 맑고 청아하게 날 그리며 웃으며, 귀엽다 말하고, 쉽게 어두워지거나 쓸쓸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죽어서도 행복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나 미숙해 보이는 이들에게 훈계를 하거나 가르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을 살면 살아갈수록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지식의 얕고 깊음은 어리거나 창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능숙하게 잘하는 것만을 강조하는. 많이 알고 깊이 알기만을 강요하는 이 사회, 조직, 갑자기 그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든다.
나와 같은 성향의 나의 아이들은 좀 더 행복한 환경과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조직에서 자랐으면..
민재는 얼마 전에 학예회 비슷한 행사를 학교에서 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발표한다는 게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는데.. 민재는 그것을 준비하고 행하는 과정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민재와 이야기하면서 발견한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맘에 맞는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
'함께 한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듯 한 저 두 가지..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그 때문에 난 육아를 하는 느낌이 아닌, 친구처럼 함께 이야기하며 그때그때 느끼는 정서들을 공유하는 것이 너무 좋다.
단지, 그들이 현재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내가 제공하고.. 내가 현재 구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에게 받는다.
쉽게 말해 돈과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고, 잃어가는 감성과 삶의 근본적인 것들, 순수함 등을 수혈 받는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냥 꼰대로 늙어가도 체감할 수 조차 없었겠지. 자신이 돌이 되어가는 줄도 모른 채 굳어갔을 것이다.
그 생의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