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랑에 적응해 가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인이 되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환희를 느끼게 된다.
처음 사랑이 결혼으로 골인하는 운 좋은(?) 경우라면 그 환희가 현실로 이어지는 경험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비슷하지만 다소 다른 사랑의 느낌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성격의 차이는 있지만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라는 경험적 데이터가 축적되게 된다.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보통 이제 내 사랑은 이 사람뿐이야!라는 전의를 다지게 된다. 그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경우 감당해야 할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특히나 남성의 경우 남성호르몬은 계속 새로운 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 전의가 더 크고 강해야만 한다.(아내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경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남자라는 일반적인 특성을 전제조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전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게 된다.
이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남녀 간의 사랑은 어느 정도 형성되어있는 자아를 바탕으로 서로 그것들을 알아나가고 함께 해 가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라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창조의 기쁨(?)과도 직결되어 있다.
아이를 우리가 만들었고, 만든 아이의 인성과 성향을 이루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내가 해왔던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초심이 떠오르기도 하고,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갈 때는 내 생명을 건진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민재가 세 살 때였나? 남산 1호 터널 화재현장에서 차를 버리고 민재를 안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뛰쳐나왔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난 민재를 위해 내 몸을 내던질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끔 이런 극단적인 상상을 하곤 한다. 아이가 배가 고파 당장 죽어간다고 하면 내 살을 떼어내 먹일 수 있을까?
물론 이성적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거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내 건강한 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면 틀리겠지만 선택의 수단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난 과감히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쳐줄 수 있는 그늘.
야생에서의 육아를 생각한다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이가 자랄 수 있게 물을 주고 그늘을 쳐주는 동안 내 등에는 번개가 치고 칼이 떨어지고.. 햇볕이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는 상황도 생길지도 모른다.
현실세계에서는 나의 많은 재화나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너 때문이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의 품에 있을 때 지켜줄게.. 할 수 있는 내 모든 것을 다해서..'
아마도. 나의 유년기가 생계에 대한 많은 시련들로 얼룩져있지 않은 것은 부모님의 이런 희생들이 뒷받침되어있기 때문이겠지.
그들도 등을 옷을 벗겨보면 수많은 흉터와 화상과 상처들이 가득하겠지.
하지만 감히 생각해본다.
그들도 처음 하는 사랑에 빠져. 그 모든 것들이 행복했으리라고..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