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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하숙생 Apr 21. 2023

제가 해봐서 아는데 하지 마세요

응원은 못해도 기죽이진 맙시다.

뉴욕 플러싱에서 자영업을 한다는 아저씨 K에게 만난지 1시간 만에 들었던 말이다. 미국에서 가장 한국사람 등쳐먹는 사람이 한국사람이고, 한국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한국사람, 그래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도 한국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원래 있던 말은 아니고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을 잘 버무려서 방금 만들어낸 말인데 그럴지라도 미국사는 한국사람들에게 얘기해주면 아마 열에 여덟아홉은 고개를 끄덕일 말이다. K씨 본인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한국에서 굴지의 H증권사를 다니면서 기러기 생활을 통해 수년간 아내와 아들의 미국생활을 지원하다가 아들의 대학입학을 계기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케이스다. 나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지만 "나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옛날-사실 그와 나는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는것 같았다- 얘기를 들어야 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가 분사하는 침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걸 보니 미국에서 네일가게를 열기까지 얼마나 걸렸을진 짐작하기 어렵지만 고생 꽤나 한 모양이다. 내가 동생같아 보였는지 아들같아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선배로써 도움을 주고 싶어 그렇게 얘기했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내가 처음 미국 땅을 밟고 처음 몇달 동안은 내 낙천적인 성격탓인지 낯선 환경,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이었음에도, 마치 미드에 나오는 행인1이라도 된 것 마냥 일도 안하고 매일 여행자처럼 뉴욕공립도서관에 나가서 책도 읽고 취업정보도 수집하고 Bryant Park 공원에 선글래스를 끼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었다. 그때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었으니 날씨는 또 얼마나 좋고 꽃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있었을지는 말하도 않아도 짐작이 되리라. 잎들도 푸릇푸릇, 내 인생도 푸릇푸릇하다 생각하고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던 시간은 아내가 와장창 깨뜨리기 전까지 꽤 즐거웠다. 이제 적당히 휴식도 취했으니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아내의 말에 ’좀 더 쉬고 싶었는데 드디어 시간이 왔구나‘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본격적으로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커피숍과 식당에서 뭔가를 주문하고 이런저런 스몰토크 정도를 이마에 땀을 닦아내면서 더듬더듬 할줄 아는 정도였던 내가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니 갑자기 부담스러워졌다. 마침 뉴욕공립도서관에서도 이민자들을 위한 다양한 언어프로그램이 있어서 참여하던 중 로어맨해튼, 월스트리트 근처에 인터내셔널 센터라는 커뮤니티 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된 목적은 미국이민자 또는 비자를 가지고 미국에 체류중인 비영어권 사람들에게 미국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제공, 시민권 취득, 취업 등등을 도와 미국생활에 연착륙하게 하는 것이고 미국을 이해할수 있게 다양한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나 또한 지금 알고 있는 미국 사회 시스템의 대부분은 이 곳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사들은 주로 자원봉사를 하는 은퇴자들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말도 빠르지 않아서 이민 초기에 기본적인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내용들을 다루고 때로는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도 있고 요즘 같은 봄에는 학생들 한 그룹을 짜서 브루클린 보태니컬 가든에 가서 벚꽃을 구경하기도 하는 등 정말이지 속성으로 미국을 배울수 있는 꽤 괜찮은 곳이라 나와 같은 초보 이민자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이 곳에서 이력서도 쓰는 요령과 이력서에 대한 첨삭지도도 받게 되었고 그 후 인터뷰 요령과 실제 인터뷰를 하는 연습도 하는 등 지금의 내가 경제활동을 할수 있도록 만들어준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듣고 잠깐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서 랩탑을 사용하고 있던 중에 바로 전 수업을 함께 들었던 아저씨 K씨가 슬그머니 나에게 다가와선 한국분이시냐고 물어왔다. 사실 미국에서 아내를 제외하고는 한국말로 대화하는 첫 상대였을 그에게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한게 큰 실수라는건 조금 지나서 알게 되었다. 언제 미국에 왔냐, 한국에선 뭘했냐, 가족은 어떻게 되냐 등등 기본적인 호구조사가 몇개가 끝나고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이 깜빡이도 켜지않고 훅 들어왔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미국에서도 동종업계에서 일하려고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자 그가 했던 말이 '제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 하지 마세요'였다. 인생의 선배일수도 있고 미국에 온 것도 나보다는 오래 되어 보여서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반문하려는 순간 그는 이미 내 마음을 읽은 듯 대답했다. 자신도 미국에 와서 많은 시도를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며 우유배달, 트럭기사, 신문배달, 한인수퍼마켓 등 보따리 장사가 좌판에 물건을 펼치듯 그간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과 실패한 과정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 그의 말을 듣다가 궁금해서 그럼 미국에서 저같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면 좋겠냐고, 그리고 실례지만 지금 무슨 일 하시냐고 물어봤더니 첫번째 질문에는 돈을 모아서 스몰비즈니스(한인 또는 중국 이민자들이 많이 하는 세탁소, 수퍼마켓, 네일가게, 음식점 등 흔히들 말하는 규모가 작은 자영업)를 하는게 좋고 두번째 질문에는 뉴욕 플러싱에서 아내와 네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단다. 그렇게 나에게 한참 한인 이민자들의 갈 길에 대해 설교를 하고 가게에 수금하러 가야겠다며 아마도 이민온지 2-3개월 밖에 안된 내 앞에서 여유롭게 보이고 싶었던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그렇게 누군가 전혀 부럽지 않은 적도 없었던걸 보면 그의 설교는 전혀 나를 감화시키지 못한게 틀림없다. 그의 설교에는 뚜렷한 지향점이 있었고 '스몰비즈니스'라는 그만의 정답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없는 얘길 들으며 그 또한 꽤나 고생하면서 내린 결론이겠다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반드시 취업하겠다는 다짐과 오기를 가방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를 만나고 3개월 동안 거르지 않고 다니던 로어맨해튼의 인터내셔널 센터를 더이상 나가지 않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와 더이상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걸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했고 나에게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준 그가 가끔 떠오른다. 네일샵의 특성상 Covid 시기에는 한동안 손님이 없었을텐데 잘 이겨내고 여전히 플러싱에서 네일샵을 운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스몰비즈니스에 도전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인생과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던 그를 또다시 만난다면 나도 한번쯤 되묻고 싶다. "거 응원은 못할 망정 기죽이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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