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물질
나희덕의 시집 <시와 물질>을 청량리 가는 왕복 전철 안에서 읽었다. 읽기도 전에 우주라는 물찔 속에서 물질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나 시인처럼 수영을 못하는 나도 두어 시간 수심 10미터 안짝에서 편안하게 물질을 했다고나 할까 ㅎ.
내가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2005년이었으니 딱 20년이 되었다. 읽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어서 어쩔 수 없이 지하철에서 손에 잡힌 게 시집이었다. 그로부터 수 많은 시인들이 내 손을 거쳐(?)갔다.
그 중에 내 시선을 끌었던 시인이 바로 나희덕이다. ‘사라진 손바닥’부터 ‘시와 물질’까지 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였다. 그러다 우연히 연합뉴스에 실린 시인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시로만 알던 시인의 삶, 생의 뒷면을 보는 순간 참으로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굳이 이번 시집에 비유하자면 시인이 베트남에서 보트를 타다가 핸드폰을 강물에 빠트렸을 때의 느낌이랄까. 내가 타자와 동일시 한다고 했을 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랄까. 아무튼 연예인의 뒷얘기 이상의 어떤 미묘한 여운이 남았다.
미안하지만 여류(오해하지 마시길)시인 중 그래도 시를 좀 쓴다고 생각했던 게 나희덕과 정끝별이다. 그 외에는 문장은 좋은데 자기 넋두리 같은 느낌이었다면 너무 주관적인 생각인가. 아무튼 두 시인은 여류임에도 남류 못지않은 힘이 느껴졌다.
초창기 나 시인은 아마도 시를 (잘) 쓰고 싶은 자신, 그러나 처한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듯하다. 꽃을 보고도 풍장을 해야 했고, 그러기에 그의 식탁은 늘 메말랐다. 바위도 아니면서 섬도 아닌 ‘여’의 삶을 근 30년 가까이 살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냥 추측 ㅎ
그러면서도 시인은 늘 ‘손’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 어디쯤에서 본 반달의 손, 회산 저수지의 고개 숙인 연꽃의 손, 그리고 이번 ‘시와 물질’에서 등장하는 적지 않은 손들까지… 굽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인류애를 나는 사랑한다.
또 시인은 ‘눈’에 유난히 천착해왔다. 진흙눈동자부터 이번 시집에 나오는 온몸이 눈인 물의 눈동자까지… 멀리서 바라만 봤던 사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계기는 뭘까. 나는 감히 그것을 ‘물질’이라고 본다. 30년 가까이 빚을 갚다가 은행 문을 나설 때의 그 후련함. 그리하여 가을 은행을 발로 무자비하게 찰 수 있는 물질의 힘.
그러나 시인에게 물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아이를 받아내는 산파처럼 물질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을 실뜨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이어간다. 사람의 머리처럼, 달처럼, 눈처럼, 주먹처럼 둥글둥글하게 말아서 다음 사람에게 전해줘야 하기 때문에..
시집을 읽고 나서 나희덕은 콘서트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트로트 가수가 축제 무대에서 노래 세 곡 부르고 홀연히 사라지는(출연료 빵빵하게 받고) 게 아니라, 조그마한 무대에서 관객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 같다고나 할까. 시집을 읽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공연료가 아깝지 않다. 그나마 12,000원 이라니. 그것도 평생을 두고 볼 수 있는 공연이니 이 책을 사서 읽지 않는 사람은 아마 바보 멍충이 소리 들어도 싸다. 주머니가 완성되고 나면, 주머니 속에 갇히는 게 바로 나니까. 뭐라 해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