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손목이야
오랜만에 한가한 오후.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며 일을 처리한 상인가 보다.
덕분에, 며칠 전부터 다이어리 '투 두 리스트'에 늘 군짐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피아노 연습하기>를 시도해볼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먼지가 옅게 내린 따뜻한 갈색의 나무 뚜껑을 살살 들어 올리니 가지런한 여든여덟 건반이 보인다.
오른손으로 도미솔- 하고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익숙한 소리가 울린다.
아주 어리던 날, 아마도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즈음. 일곱 살이었나, 여덟 살이었나. 하여간 그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딸을 위해 엄마는 몇 달간 돈을 모아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다.
분명 당시 형편에 많이 비쌌을 텐데, '이거 비싼 거'라느니, '사느라 힘들었으니 열심히 치라'느니 한 마디 할 법 한데,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피아노 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하셨다.
피아노 연습하라는 말도 따로 들었던 기억이 없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숙제를 내줘서 어쩔 수 없이 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내가 치고 싶은 걸 치고 싶은 만큼 쳤다. 피아노 학원 다니는 건 초등학생 때 진작 그만 두었지만 그 뒤로도 취미 삼아 피아노를 계속 만졌다.
물론 잘 치지는 못한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멈춰서 혼자 악보 보여 이거 저거 뚱땅거려보는 정도. 쳐보고 싶은 곡이 생기면 쉬운 버전 악보를 구해서 더듬거려본다.
작은 아이 손이 성인의 손이 될 때까지 똥땅똥땅 늘 소리를 내 준 피아노가 고맙다.
*
같이 학원에 몰려다니며 피아노 배우던 친구들은 이제 더는 피아노를 치지 않고, 어쩌다 친구네 집에 가도 피아노가 보이지 않는다. "그거 안 쳐서 그냥 팔았어."
친구들 중 어린 날의 피아노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걸 여전히 뚱땅거리는 사람도 이제 나뿐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아쉽다.
*
오랜만에 다시 피아노를 친다.
12월이니 손도 풀 겸 성탄 찬송가를 몇 곡 치고, 예전에 성가대하던 시절 불렀던 성가곡도 연습했다.
<오늘의 연습곡>
[목자의 노래]
[예수께로 가면]
[사랑이 오셨네]
[주의 영광]
한 시간 정도 연습하니 오른손 손목이 좀 뻐근하다.
뭔가 내 자세가 잘못되었나 보다.
주의 영광은 음을 잘못 누르는 일이 꽤 많았다.
곡의 속도에 맞게 정확히 건반을 치는 게 아직 좀 어렵다.
그래서 억지로 따라가느라 손에 힘을 많이 주었던 걸까?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주변에 피아노 치는 사람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성인 피아노 레슨 정보를 찾고 있다.
나는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은걸까?
잘 모르겠다.
종종 취미 삼아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칠 거 같긴한데
거기에 학원이나 레슨을 통한 약간의 강제력이나 향상성을 더하고 싶은 건지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니 기분이 좋은 거 같다. 살짝 아련하기도 하고, 조금 신난 거 같기도 하도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피아노를 볼 때, 그리고 피아노를 칠 때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좀 정리해보고 싶어서 글로 썼는데 역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적당히 뭉뚱그려 '좋은' 기분.
내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 좋겠다.
계속 치다보면 [주의 영광]도 잘 칠 수 있게 되고, 무엇보다 이 감정이 어떤 건지 조금 더 알게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