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라의 앨리스'로부터
패션은
붉은 여왕의 나라와 같다.
붉은 여왕의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후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나라이다. 그곳에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뒤쳐지게 된다. 주변 세계가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면 주변 세계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달려야 한다. 만약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주변보다 2배 정도는 빨리 달려야 한다.
사실
이건 패션이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감성 산업이기 때문이다.
쉽게 옷을 예로 들면,
패션 회사에서 트렌디한 셔츠 하나를 만든다고 하자. 우선 회사 내 브랜드에 준하는 디자인을 위해 트렌드를 리뷰하고 원단과 부자재 업체의 샘플들을 고르는데 보통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에서 몇 달까지 걸린다.
셔츠 디자인이 나오면
샘플감(원단 단추)으로 셔츠를 만들어 보고 보완하게 되는데 이것도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주가 걸린다. 셔츠 샘플은 품평 후 회사의 의사결정에 따라 제작 수량을 정하고 원단과 단추를 발주한다. 직물은 원사를 염색해서 직조하고 단추는 가공 후 염색까지 모두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나 몇 달이 걸린다.
그 후 공장에서 만들게 되는데
이것도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린다.
거참..
단계 단계마다 시간이 많이도 드는 패션이다.
헌데
그 사이에 TV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비슷한 트렌드의 셔츠를 입고 나오거나 인터넷 or 경쟁 브랜드에서 비슷한 셔츠가 신상으로 출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더 빨리 만들어야 하고 회사는 스타일리스트나 홍보 에이전시에 우리가 만든 셔츠를 최대한 빨리 협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셔츠를 인터넷에서 검색했을 때 바로 보이게 준비해야 한다. 거기다 오프라인도 있다.
후아 !
더 빨리 더 먼저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패션은 그래서 겨울에 여름 옷을 만들어야 한다. 미리, 먼저, 빨리 만들 수밖에 없는 시간의 속도전이 반복되는 게 패션이다. 여기다 날씨 변화에 따라 좀 더 빠르게 입고와 철수를 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고를 부담해야 된다. 재고와 결제 부담 때문에 옷값은 비싸지고 각종 수수료까지 붙으니 배보다 배꼽이 커진다.
어느 정도 준비됐다 싶을 쯤이면 아차차..
벌써 다음 계절 기획을 할 시간이다.
그래서 패션은,
붉은 여왕의 나라와 같다.
패션의 가격 거품은
만든 이가 견뎌야 할 부담에 대한 보험이다.
물론,
만든 이의 긍지에 대한 보상일 때도 있다.
여기서 보험과 보상을 구분 짓는 건
가격도 사는 이도 아니다.
만든 이의 방향성과 책임의 무게이다.
오프 더 레코드 패션 과외서
▶ 패션은 붉은 여왕의 나라 - 메커니즘(mechanism) TIP
통상 패션은 본 시즌(소비자 구입 가능 시점) 24개월 전에 전방위 컬러 공표 → 18개월 전에 패션 컬러와 트렌드 발표 → 12개월 전에 소재 트렌드 소개 → 6개월 전에 S/S(봄 여름), F/W(가을 겨울)로 패션쇼와 패션위크 수주 → 제조 및 유통 →본 시즌이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개월 수가 짧은 패션 파트(동대문)도 있겠지만 통상 원래의 출시 시점보다 2년을 빨리 움직인다. 2년이 빠른 패션의 메커니즘을 2배 빨리 뛰어야 앞서가는 붉은 여왕의 나라를 떠올리며 기억해주면 좋겠다.
여기에
스마트폰과 SNS로 패션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뭐든지 이제는 실시간으로 전세계의 소비자들에게 공개되어 소비되고 때때로 복제되고 있다. 특히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이메일과 늘 새로운 트렌드를 업로드하는 수많은 매체의 SNS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이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더 빨리 더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지금의 패션은 팀 버튼이 만든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붉은 여왕처럼 예민하고 변덕스럽고 흉폭하고 잔인할 정도로 얄팍해졌다.
만약 루이스 캐롤[1]이 살아있다면 패션 여왕의 나라를 써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쓴 영국의 남성 동화작가이자 수학자로 근대 아동문학의 시초라 불린다.
참고로,
우리 중에는 저렇게 시간에 쫓기 듯이 달리고 달리며,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다 아침을 맞이할 때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아드레날린 중독자도 있을 것이다. 허나 대부분은 패션에 대한 열정이 멸종 직전에 이른다.
사실 꽤나 오랜 시간
이렇게 지냈기에 열정이 멸종 직전에 이르러도 불만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간 이들이 대다수였다.
매일매일 돌아가는 버라이어티 한 패션 쳇바퀴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헌데
붉은 여왕의 나라로 살아온 패션계는 요즘 어렵다. 여름에 볼 수 있는 겨울 옷들은 여기저기 복제품으로 만들어져서 팔리기 일 수이고 일주일마다 걸리던 신상들은 예전만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열정이 멸종 직전인데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쏙 빼가는 기분이다.
참았던 이들이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동화 속 앨리스는
체스판의 규칙으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패션업계와 패션인들은
각자의 말을 골라 이 패션이란 붉은 여왕의 나라에 변화를 주었다. 종례의 패션쇼가 끝나고 납품까지 6개월이 걸리던 것을 쇼 직후 입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변화해가고 있으며, SNS를 기반으로 패션쇼를 대신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패션을 소비하는 보통의 사람들도 가치소비나 슬로우 패션처럼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가치와 값을 매겨 소비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오랜 기간 굳어진
패션 속 규칙과 시스템들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지는 정확히 가늠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변화가 패션이라는 이 붉은 여왕의 나라 특유의 흉폭함과 얄팍함은 누그러트려줄 것 같다.
그래도
패션은 속도의 차이가 생길 뿐 달리 긴 달려야 할 것이다.
패션쇼나 판매할 셔츠를 스케치로 대신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만, 패션이란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달려야 한다면
얼마나 빠르게,
뭘 원하며,
어디로,
어떻게,
왜 가야 하는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의 패션
체스판에서 우리가 고른 말로 말이다.
당신 자신이 되라.
트렌드에 빠지지 말라.
패션이
당신을 소유하도록 두지 말고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옷 입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하라.
지아니 베르사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