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아저씨'가 '개저씨' 되는 이유
나이가 들면서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시력은 줄고 시야는 넓어져야 한다. 키는 줄어들고 마음은 넓어져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력이 준 만큼 시야도 좁아지고 키가 줄어들면서 심장도 오그라든다. 특히 이런 현상은 남자에게 특히 심하게 일어난다.
꼰대 : [명사] 1.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2.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
개저씨 : 개같은 아저씨의 줄임말, 은어
남자들이 꼰대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는 호르몬의 변화도 한몫을 한다. 소위 말하는 갱년기이다. 예전에는 여성들이 폐경기에 급격히 줄어드는 여성 호르몬으로 인해 신체와 정신 양면에서 극심히 변화와 그로 인한 병리 현상을 통칭했는데 최근에 남성들도 남성호르몬의 저하로 인하 갱년기 증상을 겪게 된다.
'폼생폼사', '모' 아니면 '도'라며 마초(Macho) 기질을 보이던 남성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우유부단해지고 눈물이 많아진다. 그리고 자기 안으로 숨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대인관계에서는 타인을 통해 자신 안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때문에 타인이 나에게 하는 행동에 더욱 민감해지고 성향에 따라서는 이런 약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더욱 마초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필자의 아버지 세대는 이런 모습이 정년퇴임 시기인 60대 초반과 겹쳐서 손에 일을 놓고 집에서 보내시는 시기에 잔소리가 많아지고 자주 화를 내면서 작은 일에 사사건건 참견을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몸에서 힘이 빠지니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조직 밖으로 내쳐진 느낌까지 겹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역정을 내는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점점 젊은 축으로 이동해서 지금은 40대만 되어도 이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 형태도 달라져서 화를 내기보다는 친구들과의 수다를 떨면서 배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요즘 중년 이후의 남자들에게 실시간 채팅 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른다.
모든 이들이 내면의 문제를 자신만이 아는 방법이나 친구들 간의 대화 같은 소극적 방법으로 해결한다면 나이 든 남자들이 '꼰대'라는 비속어를 들을 필요도 젊은이들이 이런 이상한 단어를 입에 달고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꼰대 짓'이라는 불리는 행동들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삶이 팍팍해지면서 광범위하고 확연하게 나타난다. 친구들 간의 대화로 풀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을 위해 인간관계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특히나 그런 경향이 크기 때문에 깊은 유대관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힘든 탐색전(探索戰)을 펼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이후의 관계 유지가 쉬어지기 때문이다. 그 단계를 벗어나서 어느 정도 유대관계가 형성되면 그 사람의 진면목(眞面目) 또는 그 바닥을 드러난다. 여기서 진면목은 긍정적인 모습이고 바닥은 부정적인 모습이다. 부정적인 모습 중에서 최고로 강력한 평가가 바로 '꼰대'라는 단어로 표현이 된다.
'꼰대'라는 비속어에 담긴 의미는 나이 많은 이들, 이전 세대, 아버지 세대의 부정적 이미지의 통칭이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는 있지만 실제로 '꼰대'가 정확하게 적용된 사례는 바로 '무능함+책임회피 '이 조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한참 일하실 시기에 병을 앓다가 돌아가셔서 나쁜 이미지보다는 애달픈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아버지가 조금 더 팔팔하셨던 시기, 필자가 국민학교 초반 시절의 기억들에서 가끔 아버지의 무능함과 그 무능함에 따른 자신의 피해 의식을 집에 와서 객기(客氣)나 폭력(暴力)으로 풀었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따스한 모습과 삶의 무게로 힘들어서 혼자 고민하시던 모습이 더 많이 기억이 되지만 필자가 아주 어린 시절에 잠깐 느꼈던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에는 지금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그런 것이 있다. 당시에 아버지는 30대 중후반의 '젊은 아빠' 였는데도 말이다.
필자의 세대라면, 어린 시절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 공부 잘해서 상급학교에 해를 거르지 않고 진급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번듯한 직장에 입사해서 양갓집에서 잘 자란 배우자를 만나고 아이들 둘 정도 낳아서 잘 키우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세뇌(洗腦) 받았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88올림픽으로 인해 희망을 경험하고 그 혜택을 가장 잘 누리며 자랐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IMF로 한국 사회의 몰락 과정을 보며 살았다.
필자의 친구들은 3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첫 번째 공부 잘하고 집안도 부유한 친구, 두 번째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은 그저 그런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부도 그럭저럭 집안도 그저 그런 친구. 필자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공부도 잘했던 친구들의 모습은 부럽고 좋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서로 간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수입과 소비 규모, 즉 경제적 상황의 격차가 크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어떤 회사에 무슨 일을 하던 돈 걱정을 하며 너무나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모두 다 늙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이들이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좋은 영향력은 고사하고 작은 감정적인 공감도 아이들과 나누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안쓰럽다. 우리 세대는 한국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경험했다. 1980년 초반의 일이다. 그 역사적 의의나 가치판단은 이 글의 관심이 아니다. 당시의 충격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되는 모습은 20년이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면서 더 심화되고 있다. 지금 가정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한없이 작다. 그렇다고 밖에서 다른가?
필자는 다소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도 하고픈 일들이 많았다. 물론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그것을 지원 못하는 집안 형편에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내 스스로 내가 하고픈 일을 준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내 스스로 발전해가는 모습이 좋았다. 어린 시절 꿈이던 디자이너도 되었고 30대 초반에는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되는 것 같았다. 늘 삶을 고민하고 세계를 걱정했다. 늘 조직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웠다. 그러나 이제 중년이 되니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제 새로운 도전과제가 생겼다.
내 안에 있을 아니 이미 자리 잡은 '꼰대 정신'과의 싸움이다. 지금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라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묻고 따지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너무 서글프다. 그런데 그 모습은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스스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이 더 안타깝다. 몇 달 전 오랜만에 많은 친구들이 모이는 일이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이런 슬픈 일이 있어야 모일 수 있는 상황도 조금 서글픈데 오간 대화는 더욱 그랬다. 이 자리에서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권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자리에 아이들과 친한 아빠는 없었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이것에는 재능까지 포함하지만)만이 아이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친구들의 한결같은 주장만이 있었다. 돈 못 벌고 사회적 지위가 보잘 것 없지만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아이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아빠는 설자리가 없다.
아버지는 존경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같은 생각 즉 공감하고 같이 놀아주고 같이 공부하는 아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아빠와는 어떤 생각도 공유할 수도 있고 친구들과의 비밀 이야기도 공유할 수 있다. 나중에 아이가 커가면서 그 아이는 아버지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버지가 힘들 때 술잔을 같이 기울이면 같이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힘 있는 리더들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대통령마저 우리가 세뇌당한 삶의 패턴을 그대로 따라간 듯 보이는 것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장군·선생님·아버지 그들이 주장하는 권위는 갑자기 무너졌다. 1980년 필자가 보았던 그 사건은 물론이고 돈 때문에 제자 앞에서도 약해지는 선생님, 아버지들은 또 어떤가? 아이가 말을 안 든는다고 고함을 지르거나 매를 들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이 권위를 세우기 위함인가? 아이를 바르게 키우기 위함인가?는 무척 중요하다. 특히 조직 안에서 작아진 나를 집안에서 세우려고 한다거나 부인 앞에서 작아진 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라면 당장 그 행동이나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게 지른 고함은 10년 후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반대로 나이가 많다는 것의 장점도 생각해보자. 요즘 세상이 얼마나 가벼운지 '얕은 지식을 모아둔 포털'이라고 자신들의 서비스를 강조하는 기업도 당당하게 광고를 하는 세태이다.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진실은 얕은 지식은 수다떨기에는 좋지만 그것으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분명한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은 올해의 '유행색'이나 '치마 길이'를 이야기하듯 그렇게 짧은 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의 호불호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인생들을 통해 알게 된 인류 공통의 지혜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전 세대 인류가 갈망하던 절대 진리에 대한 탐구가 '쓸데없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생성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라는 이 시대정신의 골자는 절대 진리는 없기 때문에 '그냥 그때그때 내가 좋은 대로 살면 되는 거야!'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가벼움은 이런 시대정신이 기인하고 많이 이들이 삶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치명적인 독성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기준을 배제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불안감이다. 그냥 그때그때 좋은 대로 사는 것은 좋은데 그때그때 좋은 것은 다음 날 분명한 후회를 가져온다. 후회의 축적은 불안·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돈'은 현대인이 쫓은 강력한 진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돈도 이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현대인들은 절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저(基底)로부터의 궁금증을 안고 살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인생의 시간은 그저 좀먹고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개인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인생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진리· 순리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된다.
'생활의 달인'을 생각해보자. 그들의 빠른 손놀림은 그냥 반복작업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 동작은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 그리고 실험 즉 생각과 상고와 고민을 통해 얹어진 것이다. 효율적인 동작을 알게 되고 익숙해지는 메커니즘이 이런데 인생 전체도 그렇지 않을까?
처음 이 글을 시작했던 작은 생각으로 돌아가 보겠다.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느려진 손놀림만큼이나 고착화되고 굳어진 생각·고집 또 이미 만들어진 권력에 의지해서 어린 사람들이나 약자를 괴롭히는 악한 늙은이의 모습으로 치부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 것에도 양면이 존재하고 편가르기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필자의 세대, 선배 세대 그리고 아버지 세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필자보다 젊은 세대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린 후배들보다. 더 좁은 시야와 식견을 가진 선배들이 세상에는 많다. 특히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선배들의 모습은 아주 가관(可觀)이다. 필자 역시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고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더 한심스럽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몇 년간 필자보다 젊은 친구들의 모습에서도 소위 말하는 '꼰대'를 보고 있다. 고착화되고 자기가 만든 권력 안에 머무르려고 하고 권력과 부에 기생하려고 하는 모습. 또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모습들 말이다. 그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돈에 대한 집착이다.
만일 그것이 당신에게 있다면 지금 젊음이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하루라도 더 생을 살아간 선배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욕하지 마라. 당신도 그 나이 되면 꼰대짓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욕하는 그 '꼰대'들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점은 반드시 확인하고 공포에 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