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중에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이 있다.
1930년대에 각각 시차를 두고 발표된 단편들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할리 퀸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바람처럼 나타나 사건의 본질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실제 현장을 관찰하고 상황을 서술하며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는 인물은 새터스웨이트이다.
새터스웨이트는 이런 사람이다.
올해 예순두 살, 등이 약간 굽었고, 주름진 얼굴은 괴상한 요정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남들 사생활에 예민하고 관심이 많았다. 말하자면 그는 한평생 관람석 맨 앞줄에 앉아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여러 드라마를 관람해 온 것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언제나 구경꾼이었다. (11, 12쪽)
예술 애호가에,
그가 모르는 사람도 없었고, 또 그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139쪽) 사람.
어떤 만남, 어느 모임에도 자연스럽게 섞이지만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고 사람과 상황을 늘 관찰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파악하지만
자신의 판단 기준은 흔들리지 않는다.
특별한 직업이 없으나 넉넉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는 그는,
해마다 1월의 두 번째 일요일이면 새터스웨이트는 영국을 떠나 리비에라로 갔다. 그는 제비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때를 맞춰 움직였다. 4월에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5월과 6월은 런던에서 보냈으며, 에스콧 경마를 놓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명문 학교인 이튼과 해로우의 운동경기 시합이 끝나면, 도시를 떠나 시골에 아는 사람의 저택을 서너 군데 방문한 뒤 도빌이나 르 뚜께로 갔다. 9월과 10월의 대부분은 사냥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대개 도시에 머물면서 한 해를 정리했다. (139쪽)
동화책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던 아이는,
너무나 싫은 등굣길 내내 어젯밤에 읽은 소설 속 세계를 상상하면서 현실로 들어갔고.
하루 종일 현실의 학교를 견딘 뒤에는,
(견뎠다고는 하지만,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해도 친구들과는 즐겁게 보냈다.)
하굣길부터 잠에 빠질 때까지 또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며 보냈다.
그래서 약간의 현실과 대부분의 가상이 뒤섞인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 그 아이가 꿈꾸었던 자신의 미래란,
아마도 새터스웨이트 같은 생활이었을 테니.
뭔가 떳떳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뛰어들지 않고,
뒷동산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세상을 그저 관찰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관찰한 바에서 인간과 세상에 관한 결론을 언젠가 얻었을 때,
그걸 글로 써야지, 했었다.
이것저것 호기심은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 나름대로 분주했는데.
심심한 적은 없었고 늘 뭔가는 했다.
하지만 내가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렇다고 부모에게서 돈을 받겠다고 계산한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부모님 덕에 살아왔지만)
부자 시부모나 남편을 만나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가난을 무릅쓸 각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이 지나고, 마흔 살을 넘긴 뒤에도 '돈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졌는데도 말이다.
하늘에서 솔솔 뿌려주는 하얀 눈송이처럼,
내게는 언제까지나 하늘의 도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같은 소설 중에 마흔은 훨씬 넘고 쉰 살이 되어가는 어떤 인물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렸다. 세터스웨이트는 그런 일에는 대체로 정확했다. 그 젊은이는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완전히 자란 개들 중에도 강아지 같은 구석이 있는 놈이 있는 것처럼 이 낯선 남자에게도 그런 구석이 있었다. … “이 친구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어. 확실히 그래."(176쪽)
뜨끔했다네.
작가는 피터팬은 아니라고 덧붙였는데.
네, 개중에는 성장이 매우 불균등한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인용 서적-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Mysterious Mr. Quin>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나중길 옮김, 황금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