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설 속 무직자들

혼자 놀아요

by 기차는 달려가고

근대시기 영국 소설 속 인물들은 딱히 직업은 없으나 수입은 있어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하급귀족이나 신사 계급이 다.

(그런 내용만 내 기억에 남았을 수도 ㅋ)

남자들은 대체로 교양 있고 선량한 신사들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힘껏 돕.


그들의 돈벌이에 관해서는 물려받은 재산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아마 작가와 독자는 양해가 되었는지,

상속이나 파산 같은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아니면 일상에서 돈 문제는 거의 들먹이지 않는다.

직업을 갖지 않은 그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18세기 소설 <트리스트럼 섄디>의 '토비 삼촌'은 내가 아는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착한 사람이다.

속상하면 '릴리벌리로' 노래 한 구절을 연거푸 휘파람으로 불면서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한참을 성가시게 굴던 파리를 잡아서는 창밖으로 날려 보낸다.

"잘 가라, 이 세상은 너와 나를 충분히 담을 만큼 넓다"면서 말이지.

전쟁에 참전했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트림 상사를 하인으로 삼아 친구 같은 우정을 나누는데.

토비 삼촌은 물려받은 영지에서 트림 상사와 함께 군대놀이에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쏟는다.

진지를 구축하고, 참호를 파고, 무기와 사병들의 모형을 만들어 전력을 배치하고.

전략을 짜고, 전쟁사의 의미 있는 전투를 재현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에는 자신이 보살핀 고아 소녀 에이더를 사랑하여 결혼 약속을 받아냈지만.

에이더가 마음에 다른 남자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난 뒤에는,

몰래 집까지 마련하여 그들의 결혼을 돕는 온유한 신사 잔다이스 씨가 있다.


역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곤경에 빠진 올리버를 구출하여 사랑으로 보살피는 점잖은 노신사가 있고.

소설 <픽윅 클럽 여행기>는 직업은 없으나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네 명의 남자가 클럽에서 만나 여행한 기록이다.

특히 픽윅 씨는 세상을 관찰하고, 인간 본성을 고찰하는 데 대단한 재능과 시간을 쏟는다.


이미 썼듯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속 새터스웨이트도 인생사와 세상사를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여행하고, 음악회와 미술 전시회에 참석하며, 경마와 경기 관람을 즐긴다.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 공작부인, 백작부인, 작가, 화가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매우 바쁘다.



하지만 모든 무직의 인물들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례식을 마치고> 중 차남인 티모시는,

장남에게 물려준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버지에게서 상당한 유산을 받았다.

그는 평생 자신의 건강이 아주 좋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드러누워 일일이 아내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불평불만과 짜증만 세상에 퐁퐁 내보내면서 말이지.


역시 소설 <황폐한 집>에는 귀족 가문 출신이나 상속자가 아니어서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는데,

귀족 출신이라 품위 없게 돈벌이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로 평생을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유복한 친척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비위를 맞춰 돈을 빌리고,

친척 덕에 가끔 마차를 얻어 타고 파티에 참석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것이 아닌 상류 생활을 맛본다.



직업을 갖지 않으나 부유하고,

스스로 독신을 선택하여 자신의 취향에 시간을 쏟는 인물을 작가가 소설에 배치한 것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려는 소설적 장치겠지.

직업이나 가족이 있으면 이야기가 복잡해질 테니 말이다.


소설은 진실을 추구하고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구조는 인위적이고

인물들은 그 가상의 세계에서 진실의 일면을 보여줄 뿐인 허구라는 점을 기억하자.

매거진의 이전글백수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