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선택

시민 은이

by 기차는 달려가고

나날이 더워지는 중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괜찮지만 한낮에는 기온이 치솟아

올여름에는 또 얼마나 힘들려나, 벌써 걱정된다.

아직 적응 안 된 더위는 입맛을 떨어뜨리고.

자꾸 산뜻한 맛, 시원한 맛만 찾게 되네.


날이 더운 데다 계속 약속이 있어서 지난 며칠,

밥상에 소홀했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하면서 은이는,

오늘 저녁에는 기필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야지,

한동안은 집에서 조용히 내 할 일만 해야지, 마음먹는다.

사람을 만나고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면 피곤하다.

생활이 흐트러져.

빨래는 밀리고 냉장고에는 먹을 게 없지.



올봄에는 제철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네.

이른 봄날의 쑥버무리와 달래장, 냉이된장국도 입맛만 다셨을 뿐, 그냥 지나갔고.

초고추장 찍어먹는 데친 두릅도,

마늘종을 넣은 마른 새우볶음도,

이 잘 밴 마늘장아찌를 담을 시기도 놓치고 말았다.

아, 제철 꼬막과 바지락, 주꾸미도.

흑흑, 잊어서가 아니었어.

포장 단위가 은이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

번번이 진열대 앞에서 망설이다 때를 놓친 것이다.

그나마 부추는,

며칠 외출하지 않고 진득이 집에 있은 덕분에,

올봄에 처음 올라온 야리야리한 부추 한 단을 사서,

빡빡한 부추전을 부쳐먹고,

살짝 쪄서 훈제오리랑 같이 양념간장에 찍어먹고.

익혀서 파는 냉동 꼬막에 부추를 넣어 꼬막비빔밥을 해 먹었다.

조금 남은 건 된장국에 넣었으니,

이번 부추는 이파리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먹었구나.

"밥상에 리듬감이 있어야 해.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매번 똑같은 반찬이면,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지루해",

그렇게 할머니는 제철요리가 맛 좋지, 건강에도 좋지.

보약 같은 싱싱한 제철 재료로 정성을 다한 밥상을 차려내셨다.



집을 나선다.

오늘은 멀리까지 가볼래.

언덕을 내려가 큰길 건너 주택가를 지나면 한강에 이르는 지천이 나온다.

물을 끼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길가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는데.

두 달쯤 전인가.

어린 이파리들이 막 크기와 빛깔을 펼쳐나갈 때,

꽃들이 피고 지고 화사할 때,

그 개천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한강까지 닿았었다.

그동안 풀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자세하게 보고,

스케치를 하고,

사진도 찍고,

글로 일일이 기록할 거야.

돌아오는 길에 생협에 들러서 제철음식을 찾아 반찬거리랑 과일을 사 올 생각으로,

장바구니와 보냉백, 아이스팩도 배낭에 챙겨 넣는다.

개천 길을 걷기에 좋은 날씨다.

아침이라 따갑지 않은 화사한 햇살이 세상을 골고루 비추고요.

맑은 물은 졸졸 또는 콸콸, 경쾌하게 흐른다.

길 가,

나무 이파리들과 풀들은 이제 초록빛이 점점 더 짙어가면서.

크고 넓게 활개를 펼치니.

여름 깊숙이 들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어, 개천 한가운데에 섬이야?

아마 갈대인 듯한 길고 푸른 풀들이 물 한가운데서 빼곡하게 자라는데,

그러고 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다.

군데군데 무리를 이루고 있네.

봄에도 있었던가?

갸우뚱,

왜 몰랐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봄에도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흙더미가 흐르는 물 밑에 있다가 풀들이 높이 자라면서,

그 모습이 물 위로 드러난 건지 모르지.

오래전 늦가을에 나주 갔을 때,

영산강에 그렇게 갈대섬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보라색 연무 같은 갈대 무리가 강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는데

마치 비현실의 풍경처럼 멍하니 바라봤었어.

아름다우면서 신기했거든.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경쾌하게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한껏 볼륨을 올린 간드러진 가요가 들려오네.

쩌렁쩌렁.

어디 행사라도 있나,

양미간을 찌푸리고 두리번거리는데.

앞에 가는 노인의 목에 걸린 휴대폰에서 나오는 거였다.

길 가던 사람들 모두 발걸음을 빨리 하여 그 노인을 피하는데.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일부러 도발하는지.

걷는 둥 마는 둥,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소음을 피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노려본다.


저렇게 남들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정상적인 시대에는 뒤 편에서 웅성거리기나 하던 파렴치한들이,

이번 정부에서 죄다 앞으로 튀어나왔다.

탐욕과 무능과 거짓에 무책임까지,

온갖 나쁜 것들을 집약한 자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니.

법을 무너뜨리고.

윤리나 도덕성, 염치와 체면은 애당초 탑재가 안 됐으며.

뭐든 지맘대로,

자리가 요구하는 책무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 호주머니나 채울 줄 아는 망나니 노릇을 매일 해대네.

비슷한 무리들이 신나라 하면서 판을 깔았다.

바로 몇 년 전.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 욕심은 많아서 부패를 저지르던 허수아비 대통령을 끌어내렸는데.

그 사건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안 벌어질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이,

진정, 실화?

은이는 이 기막힌 현실에 마음이 답답하다.



은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선하고 정의롭기를 바란다.

그래서 은이는 자신이 그 선함과 정의로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폐는 끼치지 않으려 한다.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악이 흩뿌려져 있고,

그 악들은 탐욕으로 서로 뭉쳐 거대한 위력을 행사하지.

악은 이익 앞에서 절대 머뭇거리지 않아.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수시로 알쏭달쏭 가면을 바꿔 쓰지만,

그 천박한 탐욕과,

선을 향해 뿜어내는 증오심으로 사악함은 확연히 드러난다.


반면에 선하고 정의롭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도 모래밭의 사금파리처럼 반짝반짝 예쁜 빛을 발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은 미약하네.

혼자,

조용히,

뒤에서... 가만히 있어.

많이 수줍어하거든.

은이는 이 세상에 흩어진 자잘한 선의가 함께 모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이 앞장설 용기는 없지만,

누구의 선함이라도 응원은 하고 싶다.

그래서 선함이 힘을 얻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확고하게 자리 잡기를 꿈꾼다.


은이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면서 그 가격이나 기능, 품질, 모양도 고려하지만.

가능한 한 바른 가치관으로 운영되는 업체,

환경과 윤리를 생각하여 올바른 제품을 만들려는 성실한 태도를 우선 고르고,

회사 구성원들이 세상의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엄청난 포부를 품고 일하기를 바란다.

직원이나 협력 업체에 기혹한 기업은 피하고.

부패하고 사악한 세력과 결탁하는 기업주도 싫어.

가급적이면,

은이가 아는 선에서는 말이다.


선거날 정치인에게 행사하는 나의 한 표나,

매일매일 지갑에서 꺼내는 나의 지폐나,

세상에 대고 내 의견을 피력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은이는,

이 세상에서 착함이 보다 힘을 얻도록 일상에서 연대하고 싶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생활비라도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참여하셨던 생협을 종종 이용한다.

(네, 생협이 정답은 아니에요.

본래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도,

점점 기존의 기업을 따라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는 농부들의 상처 입은 농산물을 사주자는 공지가 올라올 때,

그 농산물들이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은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비자들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런 마음이 좋다.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살벌한 세상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자잘한 선의와 연대의 조각들.


생산자 직거래도 종종 이용한다.

겨울 내내 당근과 고구마를 생산자에게서 한 박스씩 사서 두고두고 먹었다.

보리차와 옥수수차는 지방의 어느 방앗간에서 볶은 제품을 배달받고.

작은 기름 전문점까지 일부러 가서 직접 짜는 참기름과 들기름을 산다.

공정무역업체에서 커피와 소품을 고르고.

환경 문제까지 고려한 제품을 선호하지.

때때로 비영리단체에서 주관하는 농산물 직거래장터에 놀이 삼아 참가하기도 해.

은이는 이런 정보들을 모으고,

멀더라도 직접 찾아가 물건을 사고,

같은 마음으로 참가한 사람들과 무언의 연대감을 이루는 훈훈한 분위기가 좋다.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면서 가게주인과 나누는 몇 마디 짧은 이야기가 재미있고.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기업의 홈페이지 쇼핑몰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축제 같이 흥겨운 직거래장터는 신나고.

넓지 않은 면적에 소박하게 진열된 생협 매장은 정다우며.

플라스틱 포장 대신 수확한 모습 그대로 쌓여있는 울퉁불퉁 농산물은 참으로 기뻐서,

하나하나 살피다가 그중 어느 것,

나랑 우리 집에 갈래?-초대하는 그 순간이 좋다.

또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를 집으며,

이걸로 뭘, 어떻게 해 먹지?, 궁리하는 시간도 은이는 애정한다네.


백화점도, 아웃렛도. 대형 마트도, 대형 물류업체도 물론 이용한다

하지만 물건을 사면서 은이에게는 몇 가지 기피 사항이 있으니.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힌 물건은 껄끄럽다.

브랜드 파워에 속지 말 것- 이상하게 은이는 시장지배율이 압도적인 회사는 내키지 않는다.

여타의 소규모 기업에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거든.

또 최정상급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게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델료를 지불하는 회사도 싫다.

물건 잘 만들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파는 게 중요하지!

앰배서더니, 뮤즈니 해가면서 셀럽들과 결탁하는 상업성도 거부한다.

과시적이고 요란한 광고로 소비자본주의에 주눅 든 사람들 심리를 콕콕 찔러대어 물질욕을 부추기는 마케팅은 정말 싫어.

허세나 겉멋이 느껴지면 사람도. 기업도 내키지 않지.

실속 있게. 건실하게, 꼭 필요한 물건을 제대로, 건강하게 만드는 견실한 업체를 바란다.


다시 길은 조용하고.

말없이 걸어가는 산책자들을 둘러본다.

외부인들보다 동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이 길은 소박하고 정답다.

자전거가 쌩 하니 달려간다.

나무들이 넓게 그늘을 드리운 쪽으로 러닝복을 입은 남, 녀가 뛰어간다.

러닝 하는 인구가 많아진 걸 실감한다.

쨍쨍한 햇빛을 맘껏 받고,

시원한 개울물을 흠뻑 빨아올린 개천가 풀들은,

거칠 것 없이 초록빛 키를 쭉쭉 키우고.

축대에 기댄 좁은 화단에는 연하고 진한 붉은 빛깔의 장미꽃들이 활짝 활짝 피어있다.

길 가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장미꽃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다들 꽃처럼 예뻐 보인다.


생협 매장에는 하지감자가 나왔다.

아직 껍질이 얇은 아기 같은 감자.

그 포실포실한 맛을 떠올리며 감자 몇 개 집고요.

미니밤호박도 보인다.

은이의 애정템.

얼른 세 개들이 한 주머니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니,

이제 막 수확해서 단맛이 덜 올랐으니까 집에 가서 숙성시키라 하신다.

넵!

둥글둥글 토실한 파란 매실도 있네.

튼실하기도 해라.

하, 그런데 큰 상자 단위로만 판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서 매실을 쪼개고 설탕을 붓고 하면서 각각 항아리에 매실액과 매실장아찌를 담아서 1년 내내 먹었는데.

할머니 아프실 때,

혼자 만드느라 낑낑대는 은이에게 '할머니가 못 도와줘서 미안해', 하셨지.

혼자 먹겠다고 손이 많이 가는 매실액을 만들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데가 없군요.

그래서 진열대에 있는 매실액을 한 병 집는다.

얼음 넣어서 시원하게 타 마셔야지.

배 아플 때는 따끈한 물에 진하게 타마시고요.

오, 생물 한치가 있다!

어우. 예뻐라.

야들야들 작은 아이.

활동가 분께 한치로 뭘 해 먹으면 좋을까요. 여쭙자

그냥 찌기만 해도 맛있고 구워도 맛있잖아요.

고기랑 볶아도 좋고, 미나리랑 새콤 매콤한 양념에 버무려도 맛있고~ 하신다.

오, 새콤 달콤 매콤?

그래. 오늘 저녁은 한치 초무침이닷!

무침에 넣을 오이랑 양파, 깻잎을 사고.

(미나리는 양도 많고 손질이 번거로워서요^^)

집에 과일이 떨어져 가니 참외와 천도복숭아도 한 봉지씩 집어넣는다.

끙, 무거워 잉.


이달에는 생활비 지출이 많았다.

다음 생활비를 시작하려면 아직 일주일가량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 생활비 통장이랑 자잘한 페이들을 다 털면 만 원이나 남았으려나.

이전의 은이라면 다 쓸 만한 데 썼으니까,

하며 예정된 금액을 넘겨도 소비를 멈추지 않았지만.

가치 소비에 더해 정액 지출까지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으니.

이달에 예정된 금액 이상은 지출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오늘 장을 봤고요.

공과금은 모두 지불했으며.

혹시 쓸지도 모르는 얼마의 교통비 말고는 일주일 내에 불가피한 지출 항목은 없을 예정이라,

내 마음만 단속하면 돼.

장 봐온 것을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햇감자와 단호박은 베란다로 보낸다.

채소들은 손질하고 한치는 데쳤다.


세일이 끝나면 또 다른 세일이 시작되고.

물건이 팔리기도 전에 새로운 물건이 쏟아진다.

소비자가 조급할 이유는 전혀 없지.

당장 쓸 물건이 아니면 싸다고 미리 사두지 말자-고 생각하는 동안.

양념이 맛있게 만들어졌다.

데친 한치를 썰어서,

역시 먹기 좋게 손질한 채소와 함께 양념에 버무려서 흰 접시에 얹는다.

물에 불려서 깨끗이 씻은 미역도 한 줌 옆에 둔다.

삶은 국수는 동그랗게 말아서 빨간 한치 무침 옆에 놓고.

무침에 넣고 남은 초록의 깻잎은 하얀 국수 아래 깔았다.


희고 빨간 초록색,

6월의 저녁 밥상.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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