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로 살아갈래

시민 은이

by 기차는 달려가고

졸업식을 했다.

꼬맹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

학생이라는 의무를 등에 지고 올라탔던 기차는 어른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은이는 기차에서 내렸고,

레일을 달려가는 기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들판으로 나선다.

어디로 가지?

풀을 헤치며 타박타박,

스스로 길을 찾아내야 하는 앞날은 막막하지만.

낡은 커리큘럼과 꽉 막힌 시간표에 갇혀있던 은이는 졸업을 환호했다.

난 이게 좋아.



입학은 함께 했어도 졸업은 제각각이라서,

동기들은 이미 졸업해서 성인의 무게를 견디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병원에 입원하면 환자 면회도 되던 시기에 할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할머니를 혼자 병원에 둘 수 없었던 은이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휴학계를 제출했다.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며 매일 몇 시간씩 요양보호사 분과 가사도우미 분의 도움을 받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받는 할머니를 곁에서 지키는 시간은,

은이가 기꺼이 선택했더라도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몹시 버거운 일이었다.

마음은 무겁고 몸은 지쳐서 오로지 환자 위주로 살아야 했던 고된 2년 동안,

은이는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병이 더 악화된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졸업을 더는 미루지 않으려고 은이는 학교에 복학했고.

은이가 졸업전시회를 할 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 절차를 끝내고 서둘러 집을 구해서 은이는 고모가 차지해 버린,

오랫동안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을 나왔다.

정신없이 돌아간 일련의 시간을 보내면서 은이는 막막한 터널을 지나온 듯했는데.

또래들과의 세계에서 훌쩍 벗어나,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다른 차원에 도착해 버린 기분이 든다.

나의 아동기는 이제야 끝났구나,

몇 단계를 건너뛰어 훌쩍 중년의 세계에 불시착한 기분이랄지.

어떤 때는 허무의 단계에 진입한 느낌까지 들었다.

또래들이 무언가를 우르르 선망하거나 욕망하는 모습을 때,

뭘 저런 거에 매달리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해.


일단은 쉬어야지,

많이 피곤했거든.



은이는 책을 읽다가 자신이 동의하는 구절을 만나면 그대로 옮겨 쓰거나,

아니면 자기가 이해한 내용으로 풀어쓰거나,

단지 소감을 적거나 하는,

독서노트를 꽤 오랫동안 작성해 왔는데.

끄적끄적 쓰기만 할 뿐,

나중에 다시 읽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글은 이미 소화되어 은이라는 존재 안에 녹아있을 테니.

우당탕탕, 패기 넘치던 시절에 적어둔 문장들을 통해 은이의 마음을 알아볼까?


"나는 나 자신으로서만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과 생각, 어느 정도의 재능,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내가 믿는 가치관에 따라 실행해 온 행위,

그렇게 살아온 지난날과 지금 이 순간에 더해 나의 앞날에 기대하는 꿈과 포부- 이런 것으로 구성되는 '나'라는 존재로만 말이다.

내게 어떤 상표를 붙여서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직위나 소속, 직업과 재산으로 나를 규정하지도 않겠다.

아무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혹성에 홀로 떨어지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여전히 속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해 갈팡질팡 하는,

생각과 행동이 엇갈리는 모순투성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꿈꾸는 성숙한 인격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벌써부터 당당하구나."


이런 구절도 있다.


"내가 어떤 조직이나 신분에 속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내가 변질될까 두렵다.

나는 가고자 하는 방향은 있으나 아직 확고하지 못하니.

어리바리하다가 헛된 것에 사로잡힐까 봐 겁이 나거든.

잘못을 깨닫거나 되돌릴 여지도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상품처럼,

잘못조차 모른 채 오류로 굳어져버리는 거.

철광석은 펄펄 끓는 용광로에 끌려들어 가 쇳물이 되고,

쇳물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똑같은 모양과 쓰임새를 가진 도구로 만들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율적으로 폭과 깊이를 확장하며 성장해가고 싶은 거지,

바깥에서 누르는 압력에 변형당하고 싶지는 않아.

물론 '나'라는 존재가 순수하게 나의 자유의지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내면과 외부 환경이 매 순간 부딪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율하고 타협하고 극복하고 포기하는 과정에서 일정 시점의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결국 운명이라 불리는 지극히 제한된 범주 안에서의 발버둥일 뿐이라서,

사실은 아주 약간의 자율적인 판단과 선택만 허락될 뿐이라 해도,

나는 그 약간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자유, 자율, 책임, 떳떳함, 의미, 멋,

- 뭐 그런 단어들.


은이는 자신이 진정 납득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 것에 휩쓸려 살아가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부의 힘에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은 단호히 거부하겠다고 진즉에 마음먹었다.

은이는 자신이 좋아하면서 잘할 수 있고,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정당한 의미를 갖는 어떤 일을 찾아내고 싶었다.

마음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것,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안개 같은 무언가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은이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분명한 형태를 갖춘 무엇인가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내가 어느 한 시기를 진심으로 보낸다면,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는 작은 범위 안에서라도 스스로 납득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서.

나름의 기쁨을 느끼면서 내 할 만큼을 했다면,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오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좋은 결과라면 물론 환영하겠지만,

(지금은 기뻐하는 그 좋은 결과가 나중에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요.)

그렇지 못한,

아니 예상을 뛰어넘는 나쁜 결론- 심지어 운명의 사약을 받게 되더라도,

내 삶은 여기 까지는구나, 하며 순응하던가.

아니면 내가 살아내야 할 인생의 한 단계려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행복감을 느끼면서 충실하게 보낸 시간은 감내할 수 있는 고난의 용량을 확장해 준다."



오래전에는 도심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숲이었을 가파른 이 언덕배기는,

경제가 성장하고 서울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던 시기에 택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고만고만한 땅에 집장사들은 방 서너 개, 거실과 부엌,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작은 뜰이 있는 단층집을 지었고.

새집을 장만한 부부와 아이들은 행복해하면서 마당에 꽃을 심었겠지.

세월이 지나 자식들은 중년에 들어서고 부모가 노인이 되었을 때,

인근 지역이 번화해지면서 땅값이 올랐다.

늙은 집주인들은 차례차례 집을 팔아 아파트로 이사했고.

투자자들은 여름이면 넓게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들을 싹 베어내고 대지를 꽉 채워 주거용 건물을 올렸다.

집을 팔지 않은 몇 채의 주인들은 직접 헌 집을 허물고 건물을 지어서,

층에는 자신들이 살면서 다른 층은 세를 놓았는데.

지난해 늦은 가을 이사 왔을 때,

집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도로와 건물 사이 누런 풀더미가 수북한 아주 좁은 공간이 있었다.

미처 공사가 덜 끝나 방치된 듯한 그 땅은,

여기까지가 우리 땅이요, 하는 집주인의 선언쯤으로 보였는데.


며칠 전 노부부가 호미로 흙을 고르는 모습을 보았다.

목례하면서 잠깐 들여다보니 잡초인 줄 알았던 지푸라기 사이에는 연둣빛 새순이 꼿꼿이 솟아오르고.

노부부는 그 옆,

이제 막 고른 손바닥만 한 땅에 티끌 같은 씨앗을 뿌리시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하찮게 보였던 메마른 지푸라기는 지나간 생명이 남긴 흔적이었고,

겨울의 죽음을 거쳐 봄의 생명이 소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울컥, 마음에 울림이 일었다.


지루했던 긴 겨울은 끝을 보이고,

울퉁불퉁 봄이 다가오고 있는 이 즈음.

골목 어귀 노부부가 가꾸는 좁디좁은 땅은 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볕이 잘 들지도 않는데 꼿꼿이 새순을 올렸던 풀은 며칠 새 쑥쑥 키를 키워서,

동그랗게 말려있던 이파리가 펼쳐지면서 두어 뼘 폭의 땅은 초록색 이파리로 복작거린다.

씨를 뿌린 곳에서는 앙증맞은 떡잎들이 나란히 줄 맞춰 올라오네.

실오라기 같이 가는 줄기는 무슨 힘으로 무거운 흙을 밀어 올린 걸까.

지금까지는 나무와 풀을 그저 풍경으로 뭉뚱그려 바라봤지,

그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본 기억이 없어.

몸을 굽혀 자세히 쳐다보니 파릇파릇 조그만 이파리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자신을 키워내는 몸부림일까,

마음이 찡해진다.



그날 밤 은이는 오랜만에 도구를 꺼내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골목 어귀 풀과,

그동안 산과 개천을 걸으며 보았던 꽃, 나무, 풀을 그리고 싶은 의욕이 넘쳐났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재능을 타고났다는 건 네가 유용한 도구를 가졌다는 뜻이야.

도구가 없으면 무언가를 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도구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도 없지.

먼저 도구로 무엇을 할 건지,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꾸준하게 노력해야 네가 가진 도구를 제대로 쓸 수 있단다.


단지 그림 그리는 기능만 반복하는 건 은이에게 맞지 않는다.

보기에만 좋은 그림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이제 은이는 시멘트로 둘러싸인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몹시 마음 끌리는 대상을 찾아냈으니.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환경을 이해하며,

그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생명을 마치는 식물들의 고군분투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글과 그림이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겠고.

더 적합한 방식이 떠오르면 얼마든지,

최적의 표현 방식을 찾아 여러 가지를 시도해야지.

식물에 관해 공부도 해야겠지?

기쁘게 그 모든 과정을 해내리라.



이모께서 갓 담근 김치를 보내주셨다.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않아 친구들을 불렀다.

오직 은이 이모의 김치를 먹기 위해서 모인 처자들은,

실컷 먹는 거야! 를 외치며 밥상을 받았으니.


수육 한 솥 삶아 김치, 양념한 새우젓, 쌈, 밑반찬들과 함께 푸짐하게 밥상을 차려냈다.

"이모님네 김치, 정말 맛있다."

"오, 오, 경배를 부르는 맛이야!"를 외치더니

급기야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들은 이모가 사시는 남쪽을 향해 큰절을 올리네.

좁은 공간에서 절한다고 서로 부딪치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음.


러고도 배가 덜 찼는지.

이렇게나 맛있는 김치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있을 때 더 먹어야 한다면서.

오밤중에 김치볶음밥을 볶고 김치전을 지져서 싹싹 먹어치우고는.

다음날 한낮이 되어서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갔고는.

은이가 끓여주는 콩나물 넣은 김칫국을 개운하게 들이켜고.

다시 한번 남쪽의 이모님을 향해,

맛있는 김치, 앞으로도 계속 맛볼 기회를 주십사,

사심 가득한 감사의 절을 올렸더랬다.

우르르 언덕을 내려가서 아아와 케이크까지 야무지게 먹어치우고.

배불러, 배불러,

하룻밤새 늘어난 체중을 걱정하며 바이바이,

또 봐,

은이야, 잘 먹었어.

까르르륵,

춤까지 추며 헤어졌지.


보기에는 날씬하기만 한 다섯 처자가,

김치 한 통을 바닥낸 그날의 이야기는,

먹음직스러운 김치와 음식들의 사진과 함께 한동안 SNS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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