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은이
후, 끝났다.
손에서 걸레를 내려놓고 은이는 방바닥에 벌렁 드러눕는다.
어우, 힘들어.
배낭 하나 메고 들어와 빈집을 청소하고,
필요할 물건을 사들이고,
이삿짐을 옮기기까지 어수선했던 며칠.
머릿속에서, 또 도면으로 그려가며 가구를 배치하고,
이렇게, 저렇게 방을 꾸미려고 매일매일 상상해 왔는데.
네,
현실은 달랐습니다.
꿈은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자꾸 내가 상상으로 기대한 가상을 흘끔거리게도 한다니까요,
그래도 부엌이 따로 있는 구조에
십 수년을 자랐던 방보다 넓어서 이 정도면 살 수 있겠지, 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거실과 드레스룸과 여분의 방이 있는 너른 아파트에서 방 하나를 침실로 쓰는 것과,
생활의 모든 기능을 집어넣은 방 하나에서 생활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트럭에서 내린 물건들로 방이 가득 찼을 때
은이는 얼마나 막막하던지.
산더미 같은 이 물건들이,
요만한 공간에 정리정돈이 되기는 하는 걸까,
물건들로 어질러진 방에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통로에 망연히 서있다가,
도망치듯,
에잇, 밥이나 먹자, 하며 돈가스 집으로 내뺐더랬다.
부엌이 좁다.
현관을 들어서자 바로 시작되는 일렬의 부엌에는 인덕션과 전자레인지가 있는데,
은이가 보기에는 제대로 조리할 수 있는 면적이 나오지 않아
인스턴트 음식이나 데워먹고 말라는 건지, 원.
밥에 진심이셨던 할머니의 부엌에는,
조르르 작은 항아리들에 각각 쌀과 잡곡들이 들어있어서,
할머니께서는 그날그날 날씨나 입맛에 따라 곡식을 골라 밥을 준비하셨지.
은이도 할머니의 그런 부엌을 갖고 싶은데요.
지금은 꿈일 뿐, 언젠가를 기약하자.
방은 고심하고 궁리해서,
작업대로 쓰는 커다란 책상과 여섯 단의 책장,
문이 두 짝인 옷장과 행거,
그리고 서랍장 두 개와 침대를,
기능을 나누어 공간을 배치했다.
베란다에 면해 있는 벽은 작업용 책상과 책장으로 꽉 찼고.
침대는 우드블라인드를 친 남쪽 창문 옆에 두어서
아침에 일어나 윗몸을 일으키면 창을 열어 하늘을 볼 수 있지.
옅은 하늘색 체크무늬 코튼 이불보가 덮인 침대 옆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각각 쓰시던 낮고 긴 서랍장 두 개를 붙여두어,
다른 공간과 구분하는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어냈다.
수십 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지품이 들어있던 낡은 서랍 안에는 더운 계절을 기다리는 은이의 얇은 옷들이 얌전하게 개켜져 있고.
서랍장 위에는 전기스탠드, 공기청정기, 태블릿과 블루투스 스피커,
그리고 자잘한 일상용품을 넣은 바구니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당장 입는 계절 옷들을 걸어놓은 행거는 방구석에 두어 옷장과 가림막으로 슬쩍 가리고,
그 옆에는 외출하면서 옷차림을 볼 수 있도록 긴 거울을 세워두었어.
가림막 안쪽 철망에는 가방, 모자, 목도리 같은 소품들을 걸어두었는데,
아니, 무슨 가방이 이렇게나 많아!
백팩만 하더라도 시티 용, 여행 용.
크기 별로,
색상 별로...
남 일인 양 고개만 절레절레.
그동안 씻을 때마다 새 수건을 꺼내 쓰고,
목욕탕에서 기초화장까지 마치고 말끔해져서 나왔던 은이로서는,
이 집 목욕탕은 면적이 좁은 건 아니지만.
길쭉한 데다가 폭 좁은 선반 하나만 달려있을 뿐이라 수납장이 부족하여.
출입문 앞에 3단짜리 트롤리를 두고
수건은 넉넉하게.
기초화장품과 집에서 입는 옷들까지 차곡차곡 담았다.
목욕탕에서 손만 뻗으면 꺼내쓸 수 있어.
일거리가 많았던 베란다도 고심 끝에 일단락되었다.
넓은 창에는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길쭉한 벽에 딱 붙여서 스피드랙을 설치해,
작업물들과 당장 쓰지 않는 물건을 넣은 단프라박스들을 층층이 얹었다.
천정 가까이 높은 벽에는 돌돌 감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잡아당기는 와이어 빨랫줄을 두 개 설치하고,
묵은 때가 들러붙어있던 타일 바닥은 몇 번이고 닦아서 조립식 마룻바닥을 깔았어.
겨울이 다가오니 바닥 냉기를 막아줄 도톰한 깔개로 마루를 덮고,
작은 접이식 나무 테이블과 캔버스 천을 댄 캠핑 의자를 두었다.
베란다가 동쪽 방향이라 아침에만 해가 들지만
은이가 종일 실내에 있어 답답해질 때,
문 열고 나가 사람이 오가는 골목을 내다볼 수 있도록,
실외도, 실내도 아닌 이곳은 은이의 휴식공간이 되어주기를.
대개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경제력으로 결정된다고 여기는데.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주거 환경의 테두리를 결정하겠지만.
그 안의 분위기는 경제적인 요인만이 아니다.
생활 방식, 감각과 가치관, 관심과 수고 같은 거주자의 내면과 실행이 살아가는 집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또랑또랑한 의욕으로 충만해,
생활의 기반인 집을 아끼고 사랑하여 수고를 쏟으면서 세심하게 손을 보면,
그렇게 보살핌을 받는 집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몹시 바쁘다거나,
마음이 어수선해서 관심과 에너지가 다른 데 쏠리면
집은 방치되어 금세 쓸쓸하고 황폐해진다.
그렇게 집 상태가 어느 정도 거주자 내면을 드러내듯,
사람을 둘러싼 일상의 환경 또한 사람 내면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집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상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집의 풍경이 거주자의 마음 상태를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일상이 분주해서 여력이 없거나 마음이 무척 괴롭더라도,
애써 청소하고 정리해서 깔끔하게 살림을 꾸려간다면.
그렇게 관심과 수고를 쏟는 충실한 시간에 집과 사람이 밀착되어,
집은 우리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어가는 거라고 은이는 믿는다.
아쉬움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만큼이 최선이야.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을 올라오거나
도심을 횡단하는 간선도로 중앙차선에서 버스를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 닿게 되는 이 작은 집은,
혼자,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갈 은이의 조각배가 되겠지.
책상은 은이가 작업에 몰두할 조타실 노릇을 하고,
침대는 안심하고 잠들 선실이 될 것이며,
베란다는 갑판이 되어 솔솔바람 맞으며 차 마시는 휴식을 내어주리라.
한없이 파아란 바다에는 무작정 뜨거운 햇살이 내리쪼이고.
때때로 풍랑이 일어 바다는 덩어리처럼 출렁이겠지만.
한결같이 은이를 담아줄 작고 예쁜 집,
언덕 위 아늑한 이 방주에서.
은이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들로 방향을 가늠하며
조금씩 조금씩 꿈꾸는 그곳을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신나게,
즐겁게,
은이가 항해를 시작합니다.
주말 저녁.
은이는 밥상을 차렸다.
어린 딸을 구하고 죽음의 세계로 떠밀렸던 아버지 어머니와,
노년의 시간을 손녀에게 헌신하신 양가 할아버지와 이제 쯤은 하늘에 도착하셨을 친할머니를 초대한다.
집들이예요.
이만큼 자라서 스스로 집을 꾸리게 됐어요.
우리 은이, 참 기특하구나, 하실 거죠?
나는 어른이니까,
살아가면서 어떤 시련이 닥치고 나쁜 상황에 놓이더라도 칭얼거리지 않을 거예요.
정직하고 씩씩하게 내 삶을 살아낼게요.
은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그날의 사고를 언급하시며,
"부모는 자식에게 매일매일 자신의 생명을 덜어주고,
자식은 부모가 나눠주는 그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거야.
네 부모는 그 과정이 순간으로 압축되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해 주셨다.
자식은 부모의 무덤 위에서 자라는 나무가 아닐까?
자식은 부모의 생명을 디디며 자랐을 터였고,
부모 또한 그 부모의 목숨을 거름으로 자라났을 거였다.
그렇게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을 거듭하였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가 태어나고 자랐겠구나.
대대로 이어온 부모 된 자들의 누적된 무덤 위에서 자라난 '나'라는 나무는,
번쩍번쩍 치렁치렁한 겉치레로 모자란 존재를 꾸밀 것이 아니라,
오직 본질에 치중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깊이 뿌리내리고 굵은 줄기를 키워 무성한 이파리를 넓게 드리우는 튼튼한 나무가 되겠다고.
은이는 오늘,
천국에서 내려와 주셨을 다섯 분께 약속드렸다.
병원에 누워계신 외할머니는 곧 찾아뵐게요.
이제 바쁜 일은 얼추 마무리됐으니,
외할머니랑 시간을 보내야지.
상에 오른 불고기는 맛있었다.
미역국도 물론.
대구전, 너무 좋지.
재료를 먼저 손질해 두고 순서대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부엌이 좁으니 한 가지 음식이 끝나면 그 음식을 담아 방으로 옮긴 뒤에.
도구를 씻고 조리대를 정리해서 처음 상태로 되돌린 후에야 그다음 요리를 시작할 수 있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집들이라고 제법 신경 쓴 밥상을 차려서 멀리 저승에서 오신 손님들을 모셨을 때,
은이는 허기져서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이 맛있는 밥상에서 도란도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께 오직 은이 손으로 꾸민 이 집을 자랑하고,
내가 짐 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좁은 부엌에서 밥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
생색도 팍팍 내면서,
영혼들 몫까지 밥그릇을 싹 비웠다네.
2023년 늦은 가을.
은이가 항해를 떠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