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Sep 21. 2019

이터널 선샤인 같은 소리 하네

헤어진 연인에게 연락하는 법

이상한 계절이다. 늦여름의 나른한 열기와 초가을의 넉넉한 바람이 뒤섞인 계절.

이 계절의 라스트 노트는 사람의 마음을 간질이고 희롱한다.




아 교양 있게 시적으로 쓰려고 했는데 역량이 부족하다. 그냥 쓰겠다.

찬바람 부니까 갑자기 머리가(아니면 다른 데가?) 어떻게 된 건가? 오늘 2명의 전 남자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이 글은 전 여자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싶은 남자분들에게 슬쩍 찔러주는 조언이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된다.


"연락하지 말자"



나는 원래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덥석 덥석 잘 받는다. 누워있다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무 생각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생경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말하면서 내 전화가 맞냐고 물었다. 네 저 맞아요 누구세요?? 그는 단번에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발신자의 정체를 추측했다.

1번. 워커홀릭 인사담당자/ 2번. 동아리 후배/ 3번. 잠깐 스쳐 지나갔던 남자


나 U... 기억나?


.............? 자 여기서 U가 누구인지 설명이 필요하겠다. U는 내가 26살 때 만났던 전전 남자 친구인데, 대~~ 기업 연수를 수료하고 나오자마자 연수원에서 만난 여자랑 눈도 맞고 마음도 맞고 아무튼 이래저래 잘 맞아서 나에게 이별을 고했던 남자이다. 그는 나의 신뢰와 우리의 유대감을, 만난 지 한 달도 안된 여자와의 설렘과 엿 바꿔먹듯이 바꿔먹었던 남자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러 오는 길에 자기 친구들과 메신저로 시시덕 거렸고, 나와 헤어진 다음날 L여대의 졸업식에 참석해서 여자 스카프를 목에 두른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꾼 남자이다.

그는 그 날 그 장소에서 나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한마디로 개새끼라는 소리다.


나는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그냥 누워있었다. 물론 성격상 오래 앓지는 않았지만 평생 그렇게 분한 기억은 없다. 슬프기보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를 저주했다. 머리가 더 빠졌으면 좋겠고 나보다 좋은 여자는 못 만나기를!

나는 덕분에 이제 남자의 말은 절반만 믿고 절반은 아무 데나 버린다. 마음은 여러 개로 쪼개서 제일 가벼운 것만 받아 든다. 젊은 남자의 말과 마음에는 여자를 참담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배신성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근데 누구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놈 아닌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나에게 뭐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ㅋㅋ?) 나는 왜 전화했냐고 물었다. 그는 굉장히 불쌍한 목소리로 아주 길게 뜸을 들이면서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최근 들어서 내 생각이 많이 났다고 답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전화하지 마


나 지금 처음 한 건데...


응 그니까 이제 앞으로도 절대 하지 마. 술 먹었어? 술 먹고 전화하지 마. 아니 그냥 하지 마. 나 잘살고 있으니까 오빠도 잘 살면 되잖아 알겠지? 잘 들어가 끊을게 이러고 그냥 끊었다. 나는 친구들한테 야 대박이라고 카톡을 했고 그의 존재는 이내 형체도 없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렇다. 나는 사실 좀 신이 났다. 그렇게 호기롭게 떠나더니 질하게 3년 전 전 여자 친구 번호를 누르고 있다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거기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끊겼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올해는 이 기억으로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면 감히 나한테 연락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열 받지만...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사실 안 불쌍)

 



전 남자 친구에게도 오늘 메시지를 받았다. 10월에 한국에 잠깐 들어가니 그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짧은 안부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그날 보자고 했다.


처음 연락이 온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이 보내줬던 사진을 저장하고 있다면 보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줬다.

다음으로 연락이 온 것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8월 즈음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동안 나를 많이 생각했으며,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을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당분간은 어렵다고 거절했다. 그러다가 저번 주에는! 술에 취해 잠든 나를 귀가시키기 위해서 친구가 전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그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는 카톡이 와있었다. 아 이 친구야...


그를 만나보기로 한 것은 하찮은 이유다. 현재 심심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이성도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슨 대단한 재회를 기대하고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알던 그는 부족함이 없이 자라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체면을 조금 구겨가면서까지 헤어진 옛 여자 친구에게 연락을 먼저 해서 직진으로 다가온다는 것, 여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꼬여내었다. 재밌다.

나는 의외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위의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남성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다.

1. 전 남자 친구의 연락은 대체로 달갑지 않다.

2. 만약 정말 정말로 연락을 하고 싶다면 비겁하게 찔러보지 말자. 진지하게 말하고 성실하게 대하자.


나는 인생영화 중 하나로 이터널 선샤인을 꼽는 사람이다. 앞서 남자의 말과 마음은 믿지 않는다면서 호전적으로 쓰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진심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생겨먹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렇게 환멸 혹은 염증을 느꼈으면서도 여전히 진실한 사랑의 모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때문에 나는 한번 깨어진 사랑의 잔해를 그러모아 잔뜩 미화시켜서 새삼스럽게 앓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것은 진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감정에 취해 반갑지 않은 연락을 던져오는 것은 쓰레기를 던지는 것과 같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U가 스스로의 고질적인 미성숙함을 깨닫고, 이드에 사로잡힌 에고를 갈고닦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교양 있게 마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모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