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6-3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봄은 몰래 와서 나 모르게 조용히 혼자 있다가 가만히 떠나겠다고 매년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봄이자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집 담장 안에 핀 벚꽃은 볼 생각을 않고, 커튼이 내려진 집 안에 줄곧 머물러 있겠다, 불안과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 그 어둠 안에 계속 나 있겠다 고집을 피우면, 봄은 그런 나를 한동안 지켜보다 하는 수 없어 소리 없이 그냥 떠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거기 빈 무덤가 어디쯤에 홀로 있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여전히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함께 존재하는 그 갈릴리 바닷가, 거기로 가야 부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 그 성전 안이 아닙니다. 왕궁도 아닙니다. 우리의 치열한 갈릴리의 현실 속에 계십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고통과 고난이 함께 있는 여기 갈릴리 바닷가의 현실을 사는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물 위를 걷지 못합니다. 물 안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물 위를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있는 세상,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현실, 이 바다 속 그 물 안을 잘 헤엄치고, 그 어둠 속을 잘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주님께 그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바다와 그 어둠이 너무 두렵습니다. 그러나, . . .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마 28:5-7)
제자들은 그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다시 가야 합니다. 현실을 피하지 말고, 두려워만 말고, 갈릴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갈릴리가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갈릴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그 주님이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금요일, 닫힌 무덤과 짙은 어둠의 토요일, 그리고 이제 부활의 아침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현실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로 그 현실을 대하는 내가 달라져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서성이지 말고, 무덤가에 앉아 있지 말고, 예루살렘 성 주변을 기웃거리지도 말고, 그만 거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내 삶의 현장, 나의 현실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 다시 살아나신 나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깨닫고, 또한 그 주님을 내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 밖의 봄이 나에게도 봄일 수 있고, 그래야 오늘 새벽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에게도 부활일 수 있습니다.
2.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 42:5-6)
귀로만 들었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만 있습니다. 그건 신학입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만 있습니다. 그건 지식입니다. 그건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욥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여태 모르던, 듣기만 듣던, 머리로만 이해하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실망도 하고 투정도 하고 원망도 하고, 화도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욥을 뭐라 않으시고 욥을 직접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욥은 하나님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화도 낼 수 없는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두려움의 관계입니다. 복종의 관계일 뿐입니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라면 화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사랑하는 참 사랑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이제 하나님과 그 사랑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42장 6절의 말씀은 ‘이 말 저 말 필요 없이 내가 회개합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너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다른 말 필요 없이 회개해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욥기 전체의 내용을 보았을 때 오히려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한 신학자의 말이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의 (그리고 제 친구들이 지금까지 했던) 그 모든 말들을 다 철회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주님을 뵙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제가 이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니,) 이제 제가 너무 약한 존재라는 그 사실에 오히려 저는 위로를 얻습니다.” (Harold S. Kushner, The Book of Job: When Bad Things Happened to a Good Person)
3.
욥의 결말입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 1:1)
돌고 돌아 42장에서 1장으로, 그렇게 다시 반복되는 삶을 욥이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욥은 이제 더 이상 내가 통제 못하고 예측 못하는 현실을 두려워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직접 나를 찾아와 나를 만나시고 또한 나에게 말씀을 하시니 욥은 이제 두려움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달라진 욥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4.
우리의 동의 없이 겨울은 오고, 우리의 동의 없이 어둠은 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의 없이 봄도 왔습니다. 우리의 동의 없이 빛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의 없이 부활도 왔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나의 동의 없이 온 봄과 빛과 부활이 나의 봄과 빛과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나 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봄, 나의 빛, 나의 부활일 수 있습니다.
그 동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은 우리의 결론, 그리고 우리의 결말은 이것입니다.
“OO라는 곳에 XX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 1:1)
여기 ‘우스’라는 지명에 내가 사는 곳의 지명을 넣고, ‘욥’의 이름 대신 나의 이름을 넣으면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고 결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