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과 이사의 상관관계 - 절망과 희망 사이

'집'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

by 물밑

아랫집은 낮의 움직임을 문제 삼았다. 생활하는 시간에 발생하는 생활의 소리 때문에 나와 아내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오후 네 시에도 베란다로 고개를 들이밀고 호수를 언급하며 소리를 질렸다. 하지만 애초에 이 도시라는 공간이 적막이라는 단어와 어울리긴 한 걸까. 물론 도시와 적막의 관계성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 가정의 소리가 소음인지를 따져보는 게 먼저겠다. 그래서 따져보자면….


그가 말하는 그 시간에 우리는 집에 없다. 둘 다 맞벌이라, 아랫집이 문제 삼는 시간에 우린 한창 월세를 벌고 있다. 경비실의 안내문을 퇴근 후 발견했을 때의 황당함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경비실에 알렸다. 그 시간에 집에 없노라고 경비실도 아랫집에 전한 모양이었지만,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심각해졌다. 그가 직접 나서기로 한 때문이었다. 누구도 없는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난리를 부렸다나. "집에 있는 거 다 아는데 숨어있지 말고 나오라고" 했단다. 옆집은 그날의 일을 전해주며 자기가 나가서 설명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만 더 험악해졌다고 했다.


그가 베란다로 "9XX 호, 조용히 해!" 소리친 날엔 윗집이 내려와 우리를 질책했다. 도대체 무슨 난리를 피우길래 아랫집에 피해를 줘서 다른 이웃에게도 폐를 끼치냐고. 놀랍게도 저흰 맞벌입니다. 설명한 순간 윗집은 어머, 어쩐지 아까는 문을 안 열더니 그게 안 연 게 아니라 못 연 거군요? 사과하며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알려주었다.



요즘 우리의 매일은 이사한 집을 찾는 것으로 시작해 이사한 집은 찾는 것으로 끝난다. 임대사 계약의 눈물 나는 장점은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계약 해지는 불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체로 집이 멀찡하지 않다는 건 깨달은 순간부터 희망이 된다.


이웃들은 우리 집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누구의 문제라는 건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알았다고 젠체하는 아랫집의 난동에도 그 외의 누구도 적극적인 무엇은 하지 않는다.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방이나 건물에 불편이 있어도 웬만하면 문제 삼지 않고 참는다. 안 그래도 고단한 삶인데, 내 것'이 아닌 일에 끼어들어 더 고단해질 이유는 없다. 다들 그런 것 같다.



가해자를 지목해 온갖 말로 두드리고 싶을 만큼 아랫집과 이웃이 겪는 소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거라면, 그 고통은 진실을 변명하는 우리의 고통을 넘어서리라. 그런데도 말 전하기 릴레이만 이어질 뿐 건물을 왜 이렇게 지었냐고 건설업체에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모양새로 집을 짓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임차해 돈을 버는 일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합의를 따지는 사람도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 텐데도 서로를 탓하며 참는다. 이 문제를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몇 달 뒤에 이곳을 떠나 더 좋은 곳에서 살 거니 괜찮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건 정말 희망일까.


불안에 뿌리를 둔 희망에 길든다. 그 실체는 불안정성과 불편인데 희망이라는 외피가 자꾸만 참게 만든다. 계약서의 적힌 날짜가, 고작 그 숫자가 내 잠자리를 이랬다저랬다 하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는 기이한 해답을 얻는다. 불안할수록 희망을 붙드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처음부터 불안이 없었으면 이런 이상한 희망에 기대를 걸 일도 없었다. 그 불안이 분명 처음부터 내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내게 찾아왔는데, 다시 돌려보낼 방법을 잘 모르겠다.


결국 무주택자, 세입자, 임차인, 그런 단어가 온갖 서류에서 '나'를 대 체하면서 겪게 되는 좌절은 다음과 같다. 무모한 희망을 품는 것, 무모한 줄 알면서도 절대 그걸 무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이상의 좌절을 괜찮음으로 치환하려는 만성이다.



stibeemailVol.1 월세방의 임차인으로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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