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후반에 우린 어쩌다 또다시 무주택자가 되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내 집이라고 건축하여 7년간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까지 정성 들여 이곳저곳 가꾸며 살아왔던 전원주택을 피난 가듯 떠나 3월 하순 다른 시골 동네로 이사를 했다.
지난겨울 천붕(天崩)을 당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가족들의 추억과 땀과 정성이 곳곳에 깃들어 있었던 곳이었지만, 친구라고 믿었던 놈의 굳은 맹세 뒤에 숨은 사악한 본성을 눈치채지 못했던 불찰이 원인이었다. 그로 인해 수년간 숱한 고통을 대가로 받다가는 어쩔 수 없이 정들었던 집을 매각하고는 나와 아내 모두 적잖은 적의와 분노와 불편한 마음에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낸 후였다.
집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새로 이사 올 집을 구하다가 생활 정보지에서 지금 사는 집의 매물정보를 본 후 성급하다 싶을 만큼 일사천리로 임차 계약을 진행했다. 그동안 이사 갈 집을 찾기 위해 꾸준히 부동산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집이 가진 가치보다 많이 저렴하게 나온 임대 물건임을 금방 알게 된 것이라 머뭇거리다가는 움켜 쥔 모래알처럼 이내 내 손을 스르르 빠져나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것을 직감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새집은 어쩌다 다시 무주택자가 된 우리의 설움이나 회한을 어느 정도는 보상해 줄 만큼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일단 외형적으로 언덕 가장 위에 우뚝 선 집인 데다가 층고가 높아 별장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구조였고, 2층 다락방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키 큰 상수리나무와 산 목련과 아카시아 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숲이 손에 닿을 듯 바로 집 옆에 자리하고 있는 시원한 전망의 테라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작은 텃밭까지 있어 시골 생활의 낭만을 누리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글을 쓰는 2층 방 책상에서는 전면 벽이 오픈된 거실 쪽 상부 유리창을 통해 맞은편에 마주 앉은 집들과 언덕과 산자락을 볼 수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통유리로 된 출입문을 통해 옆 산의 시원한 전망을 바로 볼 수 있다.
집의 외관이나 전망의 이점은 차치하고라도 권리관계와 집 내부만 확인하고 쉬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아무래도 남의 집에 잠시 전세를 드는 것이니 설령 살면서 알게 될 불편함이 있더라도 2년이라는 계약 기간 만료 이후에는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정작 마음을 움직여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 가장 강한 끌림은 이곳이 바로 당진에서는 소문난 꽃동네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꽃동네라는 이름은 내가 임의로 명명한 것이고 이 고장의 이름은 성북리이다. 나는 동요에도 나오는 그 촌스럽고도 정감 있는 꽃동네라는 단어가 좋아 혼자 그렇게 정의하고 부른다. 이곳은 당진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있다. 당진이 농지의 비율이 높고 산이 거의 없는 고장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가장 유명하여 수시로 시민들이 드나드는 아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거주 환경에는 충분한 이점이 있는 곳인 데다 봄철 한 때는 벚꽃 길로 유명하기 한 곳이라 최근 들어 전원주택지로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이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고 있고 아마도 전세를 든 집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 본래 이곳에서 터를 닦고 대대로 살아 온 집들도 있긴 하지만 대게는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멋지게 전원주택을 지어 노후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만들어진, 토착민보다는 이주민이 많은 동네이다.
집주인은 산을 매입한 뒤 비탈진 경사를 살려 층층이 여덟 필지의 주택지를 개발하고 가장 높은 곳에 자신의 집을 먼저 건축했다. 그러니까 이 집은 아직까지는 이곳 전원주택 단지에 완공된 유일한 집이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천루이며 이 주택단지의 상징적인 집이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 집을 꼬닥집이라 부른다. 이 동네 방언으로 꼭대기에 위치한 집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매일 아침 아미산을 오르는 아내가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늦은 봄에는 이 단지에도 한꺼번에 여러 채의 집이 우르르 지어진다고 하니 건축 기계 소리며 뚝딱거리는 망치 소리로 몇 달은 어지간히 소란할 것이다.
이사를 온 3월 중순에는 막 겨울옷을 벗은 대지와 산들이 부스스 잠 깨어 봄을 준비하는 시기였으므로 가을에 잎들을 모두 떨구고 수척해진 나무들과 서걱서걱 마른풀들 사이로 이제 막 어린 풀과 나뭇잎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때였으나, 3월 하순의 봄볕이 따스하게 몇 날을 쓰다듬자 집 앞에 도열 한 벚나무들이 어느새 갈색 쌀알 같은 꽃눈을 빼곡히 달았다.
담 주면 꽃이 필 거야! 아내는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들과 봄 햇살을 번갈아 보며 예언을 하듯 말했다. 아내의 예언처럼 불과 일주일 후 금요일 출근길에 보니 밤새 벚꽃이 조금 피어 있었다. 며칠은 걸려야 만개할 것 같은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다음날 오후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려 동네는 금방 화사한 꽃 천지가 되었다. 불과 하루 만에 화들짝 들이닥친 꽃들의 귀향에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동네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 때는 동네 어디를 가나 화사한 꽃들이 피어 있어 마치 꽃 비단을 밟고 다니는 듯 황홀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 동네의 꽃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전해졌다. 당일에 바로 벚꽃 길은 온통 봄 꽃 마중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저수지 낚시터 가장자리에 있는 벚나무는 짙은 꽃분홍색과 연한 분홍색이 적당히 뒤엉켜 있어 형용이 쉽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저수지 물빛에 투영되었다.
사람들은 긴 꽃그늘을 따라 언덕길을 천천히 걷기도 하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고 화사한 웃음을 날리며 만개한 봄을 만끽했다. 특히 젊은 연인들은 사람들이 오가는데도 쪽쪽 빠른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저런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자랑삼아 올렸다가 나중에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나는 어느새 정작 본인들도 하지 않는 염려를 하는 고루한 중늙은이가 되어있었다.
동화 속 그림처럼 몽환적으로 화려했던 꽃의 계절은 채 1주일은 넘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 동네는 짧고 더없이 화려했던 봄꽃에 대한 추억을 안고 한 해를 사는 동네인지도 모른다. 마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하며 그리움으로 한 해를 살아가는 연인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묵묵히 인내한다.
분홍색 솜사탕 같았던 벚나무들은 꽃잎을 떨어뜨리고는 작고 푸른 잎들을 토해내며 다시 어설픈 사춘기 소년처럼 추레해졌고 길은 떨어진 벚꽃으로 온통 분홍색 주단을 깔았다. 꽃 잔치가 끝나고 상춘객들이 더 이상 오지 않는 이 분홍색 주단 길은 오롯이 이곳에 사는 동네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된다.
떨어진 꽃잎이 빗물에 씻겨 모두 사라지기 전까지 며칠간은 퇴근 후 다니엘(우리 집 비글강아지)을 데리고 꽃길을 산책할 때 나는 꽃이 만개했을 때 보다 더 황홀해져 마치 에덴을 거니는 듯 한 마음에 몹시 경도되어 있었다. 산책길에서 꼬리를 열심히 좌우로 흔들며 앞서가는 다니엘의 실룩거리는 엉덩이가 유독 가벼워 보인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꽃은 항상 사람들을 더 좋고 더 행복하고 더 도움 되게 합니다. 그들은 영혼을 위한 햇빛, 음식, 약입니다.”라고 말했던 미국의 원예 개량가 루터 버뱅크의 말처럼 사람들이 꽃의 화려함을 찾아오는 이유는 아마도 더 행복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각을 통해 마음속으로 번져오는 그 분홍빛은 영혼을 쓰다듬고 지치고 조각났던 마음에 위로의 언어를 얹는다. 나는 꽃날에 잠시 스쳐가는 상춘객이 아니라 그 꽃동네의 일부로 녹아들어 긴 기다림과 화려한 절정과 남들은 알지 못할 은밀한 후희와 다시 긴 기다림을 공유하는 그 풍경의 일부로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2022.4
꽃 동네에서 2년을 살고 지금은 다시 도시 언저리 콘크리트 속에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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