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귀스트 콩트
오귀스트 콩트는 피바람이 부는 혁명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늘 그 속에서 우리가 왜 혼란과 공포를 겪어야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했다. 원인은 바로 지적 무정부상태. 모두가 각자 제 목소리를 내며 옳다고 말하기에 다양한 의견들이 합일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것이다. 권위를 가진 ‘지적인 정부’가 없는, 지식체계에 있어서 ‘현재의 패러다임에 관한 정상과학(Normal Science)’(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1962)이 그 시대에는 부재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부를 수립하는가. 콩트는 지적 질서가 사회적 질서의 핵심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지식은 사유의 체계이며, 개인이 아닌 집단의 것이라 여겼다. 콩트의 말대로라면 실증주의적 단계로 지식이 진보하게 되고, 모두가 믿는 이론이 확립되게 되면, 사회가 안정해지게 된다.
여기서 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Sapiens)>의 아이디어를 적용해 볼 수 있었다. 그는 던바의 수 ‘150명’을 말하며, 체격도 크지 않은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하지 않고 오히려 80억의 개체수를 가지며 번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 ‘상상의 질서’를 든다. 20-30명의 집단을 거느리며 수렵채집하는 여타의 종들과 달리, 우리 종은 함무라비 법전부터 소비공동체까지 수천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을 결속하여 사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모두가 믿는 그 허구적 질서에 안정을 느낀다. 초기 화폐인 별보배고둥 껍데기와 달리 달러화는 우리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모두가 믿기로 결정할 때, 편리한 경제생활이 가능해진다. 물질적인 형태를 그나마 갖추고 있는 화폐에서 더 나아가, ‘신용’과 ‘법인격’이라는 상상의 질서는 네덜란드에 주식회사를 세웠고, 더 이상 인류는 경제에 있어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의 파이 분배 문제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합일된 질서는 축복이다. 토마스 홉스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것도 혼란스러운 영국의 정치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군주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사유’가 ‘(집단의 사유체계인) 지식’이 되길 바랐다. 홉스뿐만 아니라 루소, 로크 등 당대 유럽 지성계에는 정치철학에 대한 명쾌하게 합일된 답이 없이 서로 다른 생각들이 산발된 상태였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 시대와 오늘날을 비교해 본다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토와 주권국가의 모델이 제시되고,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이 미국과 여러 국가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세계인권선언을 200 여개의 국가들이 함께 채택하고 있다. 여전히 정치철학과 공정성에 관한 논의와 사상은 다양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믿음과 이념들이 있기에 혼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상상의 질서, 지적인 정부의 존재로 인해 오늘날은 과거보다 전쟁 빈도는 줄었고, 독재나 집단학살, 내전 등의 위험에 관한 안전장치가 잘 작동하고 있다.
여기까지 본다면, 콩트의 지적 무정부 상태는 사회정치적 혼란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근대 유럽의 정치혼란과 21세기의 전지구적 문제는 그 양상이 다르며, 지적 무정부 상태를 원인으로 환원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20세기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종료, 전후 반전주의,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시대였다. UN과 NATO, EU는 합일된 지적인 정부의 화신이었다. 20세기 미국과 유럽은 승리 이후 강력했고, 제3세계들은 열심히 개발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2008년을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에 관한 회의적인 목소리가 커졌다. 영국 보수당은 국민투표로 부친 브렉시트를 완수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였다. 개발도상국이던 중국은 주춤해진 미국을 위협했으며, 2027년이 되면 세계 1위의 GDP를 가진 국가가 된다. 인도는 이미 2021년을 기점으로 200년간 그들을 지배한 영국을 추월했다. 아시아와 남반구 국가들은 물론이고 유럽마저도 그들이 만들어온 질서에 반항한다. 남유럽을 기점으로 극우정당의 영향력이 북상하고, 반이민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대립은 지적 무정부 상태라기보다는 기존 질서에 대한 피로도 증가다.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 오던 세계는 자국중심주의, 소수자 혐오로 변해가는 중에 있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정의는 계속 바뀔 뿐이다. 왕당파 홉스에게 정의인 것이 오늘날 공화정,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는 우리들에게는 난센스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패권과 지배, 즉 서구가 상상하여 믿게 만든 지적 정부가 반드시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200년 뒤에도 과연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최고선으로 평가받을까.
지적 무정부 상태로의 해석은 반대로, 지적 정부가 제대로 정립이 되었다면 그것을 무조건적인 선으로 여기게 되면서, 오히려 파생된 부조리를 외면하고 개정하지 않음으로써 사회를 병들게 만들 우려가 있다. 콩트의 지식 진화론 3단계는, 실증적 지식을 가장 진화된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한 물리, 화학 등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보다, 아직 (그 당시에) 방법론이 정립되지 않은 사회과학의 진화에만 힘쓰게 된다. 이에 따라 정립된 지적 정부와 실증주의 이후의 진화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단일한 지적 도덕적 기준과 그의 부과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억압하며 잠재적으로 권위주의, 혹은 문화적 동질화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점차 마오리족의 언어를 잃고 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혁명기의 유럽사회의 혼란을 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지적 무정부 상태가 사회정치적 불안의 원인이라는 관점은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오늘날의 정치적 불안과 양극화,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거시적 문제에 관한 설명과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후반기 콩트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간 세계에 생산되는 농작물을 80억 인구에 균등하게 분배한다면 그들은 하루 권장열량의 1.5배를 섭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장 지글러의 책 제목 그대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옥수수가 남아 돌아서 위스키를 만들고 기름을 짜내 자동차를 굴리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 복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으로 대량으로 비료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식량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 냈다. 과학의 선물이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대양을 건너 세계일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직접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지구 반대편에 전화를 할 수도 있다. 실증적, 이성적 관점에서 본다면 과학적 방법과 합리적인 탐구는 복잡한 현재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실증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게 할 수 있다. 또한 잘못된 정보의 확산을 방지하고, 지식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과학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아주 선한 의도로, 인류 모두의 후생을 위해 연구에 전념한다. 그들은 식량 생산량을 지금보다 더 압도적인 수준으로 늘릴 수만 있다면, 기아 문제로 더 이상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소적이다. 우리의 곡물과 각종 먹거리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의 영유아사망률은 여전히 높다. 더 과학적인 것이 항상 더 선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항상 진보해 오지도 않았다.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했다.
“농업 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124쪽) 농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단일작물의 재배로 전염병에 더 취약해졌으며, 영양적으로 덜 균형적인 밀과 쌀을 주식으로 택하게 되었다. 잉여생산물은 사유재산을 낳았고, 사제와 상인, 노예를 잉태했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134쪽) 세탁기가 가정에 보급되었다고 해서 가사노동의 시간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개인컴퓨터의 보급 이후, 직장의 일감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과학이 반드시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편리하게 먹고 보관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가공식품들은 우리 인류에게 요리할 시간을 단축해 주는 대신에, 비만, 당뇨, 심혈관 질환을 선물했다. 물론 과학만능주의와 실증주의가 동의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증주의가 기후변화, 공중 보건 위기, 테러리즘, 빈곤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은 결국은 과학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를 낳게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후반기 콩트가 말하는 공감, 연민, 포용, 공동선에 대한 중요성을 재조명해야만 한다.
나는 여기서 과학과 인류애, 이성과 포용이 대립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포용은 과학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다. 아무리 지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도 자신이 만든 방정식의 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부정했다. 과학은 지적 정부와 권위와 완성된 합리적 체계를, 변칙사례라는 망치로 때려 부수며 발전해 왔다.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는 일반적인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은 신화나 미신, 점성술에 비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고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기존에 잘 정립된 아리스토텔레스 역학과도, 연주시차 등 실제 관측결과와도 전혀 안 맞는 가설(지동설)을 제시하였다. 이는 논리실증주의나 반증주의적인 과학적 방법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비합리적인 것이다. 갈릴레오의 비합리성이 과학적 합리성을 누르고 승리하였기 때문에 근대 과학이 진보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다. 다시 말해서, 콩트가 찬양한 과학적 지식과 방법론도 완전히 실증주의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가장 실증주의적인 선택이 항상 진리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권위에 기대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펼치는 자유와 포용할 수 있는 학계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정한 사상만이 진리라는 독단을 배격하고, 진리는 결코 확언할 수 없으며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에도 포용과 경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은 비단 학계 내뿐만 아니라 과학계과 비과학계(대중) 간에도 필요하다. 과학이 역사적으로 항상 선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작용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삶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의 통제와 감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과학계와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 공청회를 열고 시민사회와 토론을 하는 행위는, 이성적으로 보자면 비효율적인 과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적인 절차는 과학이 끼칠 수 있는 피해에 대해 사랑과 공감의 안테나를 켜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후반기 콩트의 인류교는 사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야 뒤늦게 자연과학과 결혼식을 올렸다. 둘 사이 부부싸움 없이 중용을 잘 낳아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지켜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