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도정신건강의학과 1

by 은도정신과

유월의 서울의 하늘은 장마기간답게 회색빛 구름을 이고 있었다. 도시의 심장이었던 명동이나 강남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이곳 종로의 변두리 상권은 시간이 멈춘 듯 한적했다. 한때는 제법 번화했을 법한 거리엔 이제는 낡고 빛바랜 간판들만이 과거의 영광을 희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김 원장의 은도 정신건강의학과는 그런 쇠락해 가는 상가 건물의 2층,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를 간질이는 것은 오래된 책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이었다.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먼,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늑한 분위기. 벽에는 데미안의 글귀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가 걸려 있었고, 창가에는 이름 모를 작은 화초들이 햇살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진료실의 김형준 원장은 올해 쉰둘. 반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은 그에게 세월의 연륜을 더했지만, 잔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와 맑은 눈빛은 얼핏 보면 삼십 대로도 보일 만큼 동안이었다. 그는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텅 빈 거리,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풍경은 그의 마음 한구석처럼 스산했다.

20년 전, 명문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야심에 차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벡의 인지행동치료, 융의 분석심리학. 그 모든 이론들이 인간 정신의 심연을 탐구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할 열쇠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개원하고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가 학교에서 배운 빛나는 이론들은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과서 속 사례처럼 명확하게 분류되는 환자는 없었고, 심오한 무의식의 갈등을 호소하는 이보다는 당장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 제가 우울증인가요? 약 좀 주세요." "밤에 잠을 못 자겠어요. 수면제 좀 처방해 주세요."

그들은 복잡한 해석이나 통찰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실질적인 해결책을 바랐다. 김 원장은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많은 환자들이 생각보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깊은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후로 그의 진료 방식은 바뀌었다. 어려운 전문용어 대신 일상적인 대화로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복잡한 이론 대신 단순하고 명쾌한 조언을 건넸다. 어떤 동료 의사들은 그를 두고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동네 아저씨 상담소’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고, 작은 위안이라도 얻어가는 것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올 무렵, 예약된 환자가 도착했다. 박선영 씨. 40대 중반의 여성으로, 단정한 옷차림에 교양 있는 말투를 지녔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늘진 표정이었다. 그녀는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졸업 후 얼마 안 되어 능력 있는 변호사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다. 번듯한 남편,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아름다운 그녀 자신.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선영 씨는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김 원장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네, 박선영 님. 어서 오세요. 지난주에 약은 좀 어떠셨어요?" "네… 그냥… 비슷한 것 같아요."

선영 씨는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배배 꼬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은 두 달 전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아들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해 시작된 남편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창밖에서는 간간이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고, 진료실 안에는 낡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아이는… 여전해요." 한참 만에 선영 씨가 입을 열었다. "밥 먹을 때만 잠깐 나오고, 자기 방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안 해요. 방문을 잠그고 있으니 뭘 하는지 알 수도 없고요.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하고…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한때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들이었다.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그녀의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하더니, 고등학교에서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다 제 잘못인 것 같아요. 제가 아이를 너무 다그쳤던 걸까요? 아니면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이렇게 된 걸까요? 어릴 때부터 좀 더 엄하게… 아니,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선영 씨는 자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이의 문제는 온전히 어머니의 양육 방식 때문만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아이에게도 아이 나름의 기질적인 부분이 있고, 또래 관계나 학교생활에서의 어려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 원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진료실을 채웠다. 그는 늘 그랬듯, 환자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에서부터 상담을 시작했다.

선영 씨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원장님. 요즘은 남편 하고도 너무 힘들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힘겹게 이어갔다. "예전에는 제가 좀 짜증을 내도 남편이 다 받아줬어요. 그냥 웃어넘기거나, 제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요즘은 안 그래요. 제가 조금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도 같이 화를 내요. 네가 그러니까 애도 저 모양 아니냐는 식으로 쏘아붙이기도 하고요."

그녀의 목소리에 원망과 서운함이 섞여 나왔다. 믿었던 남편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듯했다. "물론 제가 예민하게 구는 거 알아요. 아들 문제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편까지 저러니까… 정말 숨이 막혀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요? 왜 저한테만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기는 걸까요?" 결국 선영 씨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냈다.

김 원장은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녀의 하소연 속에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 남편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한참 동안 그녀의 감정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후, 김 원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박선영 님."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아드님 문제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물론 어머니로서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드님은 아드님 나름의 성격적인 이유, 그리고 그 나이에 겪을 수 있는 혼란스러움이 주된 원인일 겁니다.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고요."

김 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선영 씨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였지만, 조금은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남편분과의 문제 말인데요." 그는 말을 이었다. "두 분 사이에 어떤 심각한 애정 문제가 생겼다거나, 남편분이 갑자기 변했다기보다는… 제 생각에는 박선영 님께서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면이 커 보입니다. 짜증이나 분노 같은 감정들이 이전보다 더 쉽게, 그리고 더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죠. 비유를 들자면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는 그릇이 사발이었다면 현재는 종지 같아서 작은 스트레스에도 많이 힘들고 표현도 격해지는 거예요. 물론 남편분도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힘들어지고, 예전처럼 너그럽게 대처하기 어려워졌을 거고요."

김 원장은 말을 마치고 선영 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진단은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했다. "그러니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박선영 님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힘을 키우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약물치료를 통해 충분히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드시는 약의 용량을 조금 조절하거나, 다른 계열의 약을 추가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요."

선영 씨는 김 원장의 말을 듣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들의 원인이, 그저 자신의 ‘감정 조절 미숙’과 ‘약물’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 간단한 대답이 아닌가. 혹시 이 의사는 내 고통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의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료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는 낡은 상가 건물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의사의 진단이 너무나 단순해서 맥이 빠지고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겁게 짓누르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들의 문제가 전적으로 내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남편과의 갈등이 회복 불가능한 관계의 파탄이 아니라, 나의 예민함 때문일 수 있고, 그것이 약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 또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일말의 통제감을 안겨주었다.

"약으로…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선영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심과 기대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김 원장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약물치료는 감정의 파도를 조금 더 잔잔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분과의 대화도 훨씬 수월해질 수 있고, 아드님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겠죠. 물론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박선영 님이 다시 균형을 잡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힘을 되찾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기교나 꾸밈도 없었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며 쌓아온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확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선영 씨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이 의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네… 원장님 말씀대로 한번 해볼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진료실을 나서는 선영 씨의 발걸음은 올 때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낡은 건물 2층의 정신과 의사가, 그 어떤 명망 높은 심리학자보다 자신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김 원장은 창가에 서서 떠나가는 선영 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특별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늘 하던 일을 했을 뿐이었다. 복잡한 세상사를 살아가는 또 한 명의 고단한 영혼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위로와 현실적인 조언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창밖의 텅 빈 거리를 바라보았다. 해는 조금 더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낡은 상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조용히 돌아섰다. 그의 진료실에는 또다시 오래된 책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 그리고 규칙적인 벽시계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곳은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마음의 문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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