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도정신건강의학과 2

by 은도정신과

한 달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흘렀다. 계절은 한여름으로 접어들어 창밖 가로수 잎사귀는 더욱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김형준 원장의 진료실은 여전히 오래된 책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 그리고 규칙적인 벽시계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수수한 면 소재의 셔츠에 편안한 바지 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오가는 몇 안 되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예약된 시간에 맞춰 박선영 씨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달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전의 단정하지만 어딘지 위축되어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크 블라우스에 잘 재단된 명품 브랜드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웠다. 손에 든 명품 가방이 오히려 그녀의 불안정한 내면과 대조를 이루는 듯했다.

"어서 오세요, 박선영 님." 김 원장은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네, 원장님. 안녕하세요." 선영 씨는 익숙하게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약은 꾸준히 드셨고요?" "약은 잘 챙겨 먹었어요. 잠도 좀 자는 것 같고… 그런데, 마음은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선영 씨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선영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대학 동창들 모임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들 자식 자랑 늘어놓기 바쁘더라고요. 누구 아들은 명문대에 갔다, 누구 딸은 유학 가서 잘 지낸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초조하게 쓸었다. "제 아들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했죠. 다들 제 사정 뻔히 알 텐데,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들이 더 비수처럼 꽂혔어요. '너도 얼른 마음 추스르고 아들 잘 다독여봐', '엄마가 중심을 잡아야지'… 다 맞는 말인데, 왜 그렇게 듣기가 싫은지."

"비교하게 되니 힘드셨군요." 김 원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비교하게 돼요. 집에 와서 책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육아 서적, 심리학 책… '비교하지 마라', '내 아이의 속도에 맞춰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그게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요즘은 정말 사람들이 싫어져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김 원장은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창밖에서는 자동차 소음이 멀게 들려왔다. "지금 박선영 님 마음 어디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선영 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거의 속삭이듯 대답했다. "제 마음속… 자아요. 제 자아가 너무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아요.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에요."

김 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자아가 고통받고 있다고 느끼시는군요. 그럼 오늘은 그 '자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박선영 님이 느끼시는 그 자아가 대체 어떻게 생겨나고, 우리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요."

선영 씨는 힘들면서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김 원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위로가 될 말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나'라는 자각을 하게 돼요.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돼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선영 씨가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 질문은 그녀 역시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이었다. "이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거예요.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혼란에 빠지곤 해요. 왜냐하면 자아는 사실 어떤 고정된 '무엇'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선택해서 어떤 직업, 어떤 성별, 어떤 국적, 어떤 성격 같은 특정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요. 이 지점에서 자아는 당황하게 돼요. 마치 빈 도화지처럼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자아는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엇인가'가 되려고 해요."

선영 씨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 원장은 따뜻하면서도 친절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자아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되기 위한 정체성을 찾아 헤매게 돼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남과의 비교'와 '경쟁'이에요.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경쟁하게 되죠."

"아…" 선영 씨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느꼈던 감정, 자식 문제로 자신을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며 괴로워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 자아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좋은 엄마여야 해',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해', '나는 행복해야 해' 같은 정체성을 가지려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게 돼요. 소셜 미디어에서 남들의 화려한 삶을 보며 초라함을 느끼고, 친구의 성과를 보며 질투심을 느끼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쓰죠. 이러한 비교와 경쟁은 우리 삶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가져다줘요.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반복돼요. 왜냐하면 '무엇인가가 되려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에요. 이 끝없는 굴레 속에서 우리는 지쳐가고, 진정한 만족과 평화를 찾기 어려워져요."

선영 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김 원장의 말이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근원이 바로 그 '무엇인가가 되려는' 몸부림과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긴 한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김 원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어요. 바로 '정체성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정체성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요?" 선영 씨는 반문했다. 그 말은 마치 인생의 목표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인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 거죠? 어떻게 살라는 거죠?" 김 원장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힘이 있는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공허하니까 인생의 의미를 찾는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고정된 '무엇'으로 정의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이고, 삶의 매 순간을 경험하는 '과정' 그 자체거든요. '나는 학생이다'라는 정체성이 졸업 후에는 사라지고, '나는 직장인이다'라는 정체성도 퇴직 후에는 사라질 수 있어요. '나는 누구의 엄마다'라는 정체성도 아이가 성장하면 그 역할의 비중이 달라지죠. 그런데 그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선영 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김 원장의 말이 가슴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얼마나 옭아매고 있었던가.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책임하게 산다'거나 '목표 없이 산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오히려 정체성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해요.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삶의 작은 순간들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선영 씨가 되뇌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 원장의 설명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정체성을 가지지 않아도 인생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남의 시선이나 사회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순간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괴로움 없는 삶을 향한 가장 현명한 지혜가 아닐까요?"

김 원장의 말이 끝나자 진료실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선영 씨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단단하게 막혀 있던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던 '좋은 엄마', '능력 있는 아내',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는 수많은 정체성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철학적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네요." 김 원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선영 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원장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처음 진료실에 들어설 때와는 다른 종류의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이 낡은 상가 2층의 정신과 의사가 건네는 이야기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떤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진료실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 무게의 의미를 조금은 다르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원장은 창가에 서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음 환자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진료실에는 다시, 익숙한 책 냄새와 커피 향, 그리고 멈추지 않는 시간의 소리만이 고요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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