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의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공식적인 토플의 시작은 2019년 새해가 밝으면서였다.
옷장에서 아침 묵상을 하면서 ‘한번 해볼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세 돌이 채 되지 않은 막내를 집에서 키우고 있던 터라 육아가 끝나는 밤 10시가 넘어야 식탁에 겨우 앉을 수 있던 나는 책 한 장을 넘기기조차 힘들 정도로
집중의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치열한 육아의 하루를 끝낸 후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나만의 드라마 보거나, 웹소설을 보던 습관과의 싸움은 정말 치열했고, 그 싸움에서 나는 아주 자주 지곤 했다.
그나마도 2019년 3월이 되면서 미국의 공립학교는 코비드로 인해 문을 닫았고,
세 아이들과 철저히 가족중심의 삶과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삶은 모두에게 그러하듯 정말 ‘카오스’였다. 저학년이었던 2호 딸의 온라인 수업은 정말... 오롯이 내가 옆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함께 공부해야만 했고 (영어라 그랬을 거다), 기가 막힌 세명의 다른 삶의 스케줄은... 그냥 하루하루가 서바이벌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세명이라 집이 적막하지 않고, 셋이서 사회생활을 한다는 정말 크게 도움 안 되는 위로를 해가며 버티면서도, 13년 만에 시작하는 공부(토플)에 나는 오랜만에
허황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렇게 저렇게 아이들을 그해 10월부터 사립학교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숨을 돌렸지만 쪼꼬만 꼬맹이 녀석이 있었기에 늘 부족한 공부의 조건에서 조금씩 시간을 채웠던 것 같다.
20대에도 그랬지만 토플의 문제 콘텐츠 자체는 한글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문제가 틀려도 틀린 이유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독해력은 갖춰지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모의고사를 보면 쉬운 수준의 문제에서는 90점 이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그해 겨울 즈음이었다.
토플을 준비하던 그 해는 미국에서 맹장수술도 했고, 자동차 사고도 났다. 두세 달 달리면 100점은 받겠지 했던 처녀 적 시절의 의지와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고, 매일은 매일의 변수가 있고, 매일의 공부하지 못할 이유가 있고, 매일의 피곤함은 찾아왔다.
인생에서 잊고 지냈던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함은 또 다른 낯선 손님이었고, 나를 위한 돈을 그렇게 아까워하는 아줌마 정신만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미뤘을 첫 시험을 치기 일주인 전은 미친 듯이 가슴이 떨렸다.
시험은 쳤고, 점수는 생각보다 낮았지만 목표로 했던 (웬만한 주립대가 원하던 80점) 미니멈 점수는 넘었다. 시험장 분위기도 알게 되었고, 컴퓨터 사용법도 알게 되어서 한 번 더 보면 더 나은 점수를 기대는 할 수 있겠지만, 또 한번 더 보기엔 나 너무 힘들었기에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점수를 따라 야망을 품기에 아이 셋인 나는 시간도 부족하고, 몸도 힘들고, 그만큼 학위가 중요하지도 않고, 갈 학교의 지역조차 모르는 그때이기에 no more...
이제는 안다. 그 작은 점수의 차이로 내 인생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정착되지 않은 남편의 길이,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인생이 내 꿈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 속에 끝없이 펼쳐지는 인생의 선택지에 바운더리가 되어 줌을..
그리고 생각보다
그 바운더리 안에서 내가 느끼는 안정감의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그때는 그랬다. 아무것도 정해 진 게 없는 미국 생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때에 나는 토플 시험을 쳤다. (잘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