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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몽 Aug 12. 2021

공자를 통해 살펴본 막장 춘추시대

공자가 생각한  춘추시대 막장의 원인

춘추라는 명칭의 유래


춘추시대의 춘추(春秋)는 ‘봄‧가을’이란 뜻으로, 공자가 고향 노(魯)나라의 역사책을 편집해 만든 책 <춘추>의 이름에서 따왔다. 1년을 이루는 사계절 봄‧여름‧가을‧겨울을 한자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고 하는데 공자는 여기서 봄과 가을을 상징하는 춘추(春秋)만을 붙여 인간의 인생에 흐르는 시간을 표현했다. 어르신들의 나이를 ‘연세’라고 하지만 조금 예스럽게 ‘춘추’라고도 부는데, 역시 봄과 가을로 사람의 생애를 표현한 것이다. 어째서 춘추만 사용하고 하동(夏冬)이란 표현은 없는지에 관해 조선시대 율곡 이이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춥고 더움만 따져 말하면 여름의 더위는 봄의 따뜻함에서 시작하고, 겨울의 추위는 가을의 서늘함에서 생겨난다. 생겨나고 성장하는 원리로 따져 말하면 만물은 봄에 나면 여름이 길러내고, 만물이 가을에 성숙해지면 겨울이 속을 채운다. 곧 봄은 여름을 포함하고, 가을은 겨울을 포함한다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그냥 옛사람들은 봄이나, 가을이 아주 짧은 시기이다보니 처음에는 굳이 1년을 사계절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갑골문에 '봄', '가을'을 말하는 한자는 있지만 '여름', '겨울'을 말하는 한자는 없는 걸 보면.



명칭의 유래는 알았으니 어째서 노나라의 역사책 명칭이 한 시대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아예 쓰이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자가 어떻게 춘추를 짓게 되었는지, 그의 생애와 결합해 설명하겠다. 시작부터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을지 모르겠으나 그럴 것 없다. 오늘날까지 유교 문화의 상징으로 동양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인물은 따져보면 춘추시대의 혼란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공자와 춘추


공자의 초상화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춘추시대에 접어든지 2백년이 넘어가고 전국 시대까지는 백년 즈음을 남겨두고 있는 때로, 중국 전체에서 사회 혼란이 심했다. 제후국 안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제후가 신하 경대부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으며, 제후국들 간에도 영토를 탐내어 전쟁이 끝날 줄 몰랐다. 당연히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했으며,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에게는 도덕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어린 자식을 부모가 잡아먹는 식인 행위도 공공연히 일어났을 정도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조차도 이런 비극은 예외가 아니었다. 춘추시대 가장 강했던 나라의 군주들을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부르는데, 이중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은 한때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지만 말년엔 후계자가 되고 싶은 욕심으로 불타는 자식들에 의해 감금당해 굶어 죽고 말았다.


공자가 있던 노나라 역시 이런 혼란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군주보다 더 강한 권력을 떨치는 세 가문이 나라를 쥐락펴락했다. 공자는 이런 어지러운 천하에 다시 도덕을 세워보기 위해 나이 55세부터 68세까지 14년간 13개 국가를 돌아다녔다. 당시 그를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천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공자의 명성을 알만 하리라. 흔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공자는 능력도 있어서 그가 고향 노나라의 통치자 애공(哀公)의 정치를 도왔을 때는 금방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평화로워져 국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노나라가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던 주변 나라들에서 애공에게 미인들과 악공들을 보내며 향락에 빠지도록 타락시켰기 때문에 실망한 공자는 결국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권력자들은 명성 높은 공자를 환영했지만 공자가 말하는 건 언제나 “전쟁을 하지 말라”, “탐욕을 부리지 말아라”, “백성을 사랑해라”, “왕답게 행동해라” 등의 바른 말이었다. 제후들의 본심은 공자의 명성을 빌려 결국 전쟁을 하는 것이었기에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공자는 뜻이 맞지 않으면 조금도 권력자에게 타협하지 않고 바로 다른 나라로 떠났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 어진 제후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정치는 살아 있는 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대에 모든 걸 맡기기로 하고 제자들을 기르고 저술하는데 힘쓰다가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춘추>는 고향에 돌아와 죽기 2년 전까지 공자가 지은 쓴 책이다. 애공 14년 노나라에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기린이 잡혔다고 하는데, 아프리카의 그 기린이 아니라 유니콘 같이 머리에 뿔이 달린 말로 상상의 동물이다.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나의 도(道)도 끝났구나”라며 울었다고 한다. 태평성대를 만들만한 군주가 아무도 없는데도 기린이 잘못 나타나 죽었으니 안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죽기 전 남은 일로써 노나라 역대 12명의 군주(기린이 잡힌 애공의 14년까지 포함해서)의 총 242년 간 역사를 정리했다. 기원전 722년부터 481년의 노나라 역사 중 기록할 만한 사건들만을 뽑아 의견을 덧붙인 일종의 역사 비판서였기 때문에 순수 창작은 아니니 ‘창작했다’라는 명칭은 본인이 거부했고, ‘편수(編修 ; 편집하고 수정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럼 이 편수가 정확히 어떤 것이냐, 간단하게 말하면 ‘역사 왜곡’이다. 단 마음대로 한 것은 아니고 ‘도덕과 정의’라는 기준하에서.


공자는 도덕성이 없는 사람이거나 예의가 어긋난 일을 저지른 사람이면 그 사람이 아무리 권력자여도 벼슬을 깎아 기록하거나 잘못을 은근히 부각해 적고, 심지어 왕이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된 거라면 아예 즉위 기록을 삭제해서 즉위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노나라 희공 19년에는 “양나라가 망했다”라고 기록했는데, 양나라가 망한 시기는 이보다 후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적은 것은 공자가 이 시기에 양나라가 내부에서 썩어 사실상 망한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망하지 않은 나라를 망했다고 하다니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가로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을 집필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이런 <춘추>의 집필방식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이 <춘추>를 본받는다면서 역사 왜곡을 당당히 하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춘추>의 본질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앞서 말한대로 ‘도덕과 정의’이다. 흔히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이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공자는 전쟁에 있어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면 '벌한다(伐)'고 적고, 대등한 나라끼리 싸웠으면 '공격했다(功)'라고 표기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혼내기 위해 일어나는 전쟁은 '토벌하다(討)'라고 판단해 적었다. <춘추>는 결국 역사가 아니라 비평서일 뿐이니, 이 정도 역사 왜곡은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춘추>는 공자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려는 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잘못된 모습을 돌려서 비판하려는 의도가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역사서가 아니라 비평서로써 한 글자 한 글자 평범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보면 공자가 생각하는 당시 사회 혼란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춘추시대의 상황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은 모두 기본적인 도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럼 도덕은 왜 무너지게 되었나? 잦은 전쟁이 사람들의 인성을 극단으로 몰아가서다. 그럼 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었느냐?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일반 백성들이 전쟁을 반길 리가 없으니. 그럼 권력자들의 욕심은 왜 억제되지 못했냐? 제후국의 군주가 다스릴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다보면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공자가 보기에 당시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바로 주나라가 제후국의 상황을 정리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춘추시대의 상황이다.


주나라는 원래 천자국으로서 큰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천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기원전 771년 동쪽으로 도망치다시피 옮겨오면서 영토도 작아지고 치우친 위치에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그들을 이어주던 선조들의 인연도 약해진 상태에서 이런 주나라의 상황은 기존의 엄격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후국들은 더는 주나라의 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힘이 있는 자가 사실상 천하의 주인인 시대가 열렸다. 패자(霸者)라는 개념이 생겼는데 경기에서 진 자를 말하는 패자(敗者)가 아니라 힘 있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된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의 다섯 명의 우두머리 군주라는 뜻이다. 힘이 없는 주나라 황실에 제후 모임의 대표로 주도권을 쥐고 행동한 자들이었다.


다섯이라고 하지만 신분이나 자격 등의 관점 차이로 인해 정확한 인물의 구분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요한 건 한 번 패자가 영원한 패자가 아니어서 어떤 나라가 강해지면 어떤 나라는 약해기를 오래도록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시기까지는 어쨌거나 명목상으로는 천하의 주인이 주나라 왕이라는 사실은 모두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이해하기 쉽게 이른바 막장 학교를 상정해 비유를 해본다. 힘이 있는 학생들, 곧 일진끼리 돌아가며 이번 싸움에는 자신이 이겼으니 자기가 전교 회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임명장은 교장 선생님에게 받아야한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서 일반 학생들이 행복할 리가 있을까? 공자가 춘추시대 당시 느끼고 있었을 마음과 원래의 질서가 회복되길 꿈꾸는 마음이 이해될 것이다.


제자들을 이끌고 도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


공자는 ‘춘추’를 통해 주나라의 권위를 높이고자 힘썼다. 다시 천하의 질서가 바로잡혀 안정된 환경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도덕을 교육받은 백성들이 평화롭게 사는 삶을 꿈꾸었으나 결국 이런 그의 희망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479년 노나라 애공 16년 공자가 죽고, 그후 403년 주나라 왕의 어떤 선택으로 인해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그래도 공자의 제자들은 천하에서 활약하며 그의 뜻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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