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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이 나를 위로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

by 류민효

'내 그림이 나를 위로한다'는 말은 뭔가 비장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울적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 별로지만 이 문장이 가장 적절하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고2 12월, 나는 어느 대학에 갈지 생각하기 전에 어느 과에 갈지에 대해 고민했다. 다행히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해놓은 덕에 선택지는 꽤 넓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막연한 목표를 두고 공부를 하는 동안에 내가 가고자 했던 과는 '기계공학과'였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하고 단순했다. 본가가 부산인 나에게 부산대학교 기계공학과에서 대기업으로 취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는 중학교 때부터 익히 들었던 사실이었다. 나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학생들과 같이 딱히 꿈이랄게 없었고, 막연하게 대기업 회사원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두고 대학 입시 수시 원서를 쓰게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계치인데 기계공학과에 가는게 맞는 걸까?' 당시의 나는 대학에 있는 많은 과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기계공학과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가야하는 과로 여겨졌다. 그렇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은 것 같고, 사람들이 생각이 궁금한 것 같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은 것 같았다. 그래서 심리학과를 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힘이 되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다. 심리학과는 취직에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것. 당시 인터넷에서 조금이라도 찾아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금세 심리학과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렇다면 스튜어드는 어떨까? 앞서 떠올린 내 적성에 더해 나는 세계 곳곳의 새로운 장소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과였지만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는 세계지리 시간이 너무 재밌었고, 선생님께서 일부러 쉽게 내신다고 하셨어도 세계지리는 100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업시간 마지막에 틀어주시던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가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 잡았었다. 좋아, 이거다. 나는 스튜어드가 돼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여건에 따라 여행작가도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번엔 아버지와 선생님의 반대에 가로 막혔다. 스튜어드가 되기 위해선 항공관광과에 가야하는데 대부분의 항공관광과는 전문대학교에 있었고, 내가 가고자 했던 항공관광과도 마찬가지였다. 전문대학에 입학하기엔 여태 공부한 성적이 아깝다는 것이 두 분의 생각이었고, 나 역시 왠지 그런 것 같았다. 스튜어드, 나에게 정말 딱인 직업이라 생각했고 주변 친구들도 잘 어울린다고 했었는데 아쉽지만 탈락이다.

그렇게 다시 고민을 이어가는데 같은 반의 몇몇 여학생들이 간호학과에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사람들의 곁에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간호학과는 꽤 성적이 좋아야 지원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거다. 나는 간호학과에 지원하기로 마음 먹었고,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차라리 의사를 하지 왜 간호사를 하려는 거냐는 아버지의 말씀.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환자의 곁을 지키는 건 의사보다는 간호사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렇게 수시 원서 6장 중 5장을 모두 간호학과에 지원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왜 인터넷에 검색해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어른들의 말씀만 듣고는 이리저리 생각을 옮겼던 것이 아쉽다. 이때 간호사에 대해 알아봤더라면.. 그리고 스튜어드에 대해 알아봤더라면. 이때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과거를 아까워하며 미래를 선택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현재만 살고 과거는 땅 속에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간호학과에 진학한 나는 다시 고등학교를 4년 다니는 것 같은 대학생활을 했었다. 정해진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3학년이 되어서는 실습을 나갔다. 그렇게 졸업을 했고, 간호장교로 3년 간 복무하며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는 동안 그림을 그리게 됐고, 나는 간호사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전역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마침 펜데믹이라는 사회적 혼란까지 겹치면서 내가 꿈꾸던 '알바하는 예술가'는 쉽지 않았고, 군 생활 3년 동안 자기 효능감이 많이 낮아졌던 나는 동네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내가 생각했던 서울살이는 이게 아니었다. 꽤 치열한 고민 끝에 2개월만 다니고 그만 두고서는 본가에 내려가 취업 준비를 처음부터 하고서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큰 병원에서 1년을 일하고는 깔끔하게 모든 걸 포기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그림은 취미로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고,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마쳤었다. 힘들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실제로 간호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꽤 잘 해냈다. 일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잘 해나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말 수없이 번듯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배가 불렀던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간호사를 하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을 주변 지인들에게도 많이 들었고, 나 스스로에게도 많이 물었다. 핑계를 대자면, 간호사로 일하는 데에 쓰이는 하루의 절반이 너무 아까웠다.

대략 3-4개월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병원 간호사를 그만 두고는 제약 회사로 이직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가도, 아니다 병원 간호사를 그만 두고 심리학과 대학원을 가야겠다, 아니다 그냥 정신병원 간호사가 되어야겠다, 그럴거면 차라리 정신건강센터에 가자 등. 당장 전업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간호사 면허증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이점을 볼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뮬레이션들의 끝은 같았다. '적당히 안정되면 그림에 집중하자.'

질문을 바꿨다. '그림을 그리면서 살면, 겨우 돈 벌며 살 수도 있는데 괜찮냐. 그러면 연애도 못할 수도 있고, 결혼도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냐.'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십번 했고, 내 답은 '너무 힘들어서 엉엉 울더라도, 울면서 그림은 그릴 수 있겠다'였다.


그렇게 전업 그림쟁이가 됐다. 치킨집에서 알바도 하고, 실업급여를 받기도 했었다. 올해에는 사업자 등록을 하고 포스터를 팔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일이라 부를 만한 걸 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고, 공모에 지원하는 것은 왠지 일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하다.

내가 좋아서, 내가 고민하고, 내가 선택한 결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힘들 때가 있어도 쉽사리 터놓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근데 오늘 완성되어 가는 그림들을 옮기다가 문득 그림에게 위로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쉽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 나에게 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거라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계속 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이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들을 생각하면 기쁘다. 그것이 정말 전달 될지, 이 그림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내가 꿈꾸는 곳에 다가가게 해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을 지나오며 내가 얻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위로해준다. 결과가 좋으면 세상 더없이 기쁘겠지만, 이미 과정만으로도 나는 많은 걸 얻었고 그러기에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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