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나 사이
'이 그림은 그 화가의 화풍이 절정을 이룬 대표작으로...' 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있는 것 같습니다. 화풍이라는 말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해보니 세 번째 풀이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나 양식'이라는 글이 나왔다.
한번 떠올려보자. 반 고흐의 그림이라고 하면 흐느적 거리는 것 같은 붓자국이 떠오른다. 에곤 실레라고 하면 뭔가 고목 같은 느낌의 사람들이 떠오르고, 바스키아라고 하면 형형색색의 선들과 거칠게 칠해진 그림들이 떠오르며, 마크 로스코라고 하면 거대한 사각형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피카소라고 하면 보통 낙서 같은 얼굴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피카소는 정말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림에 그다지 관심이 있지 않다면 피카소의 그림들 중 대표적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 그림들을 보고서 피카소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반 고흐나 에곤 실레, 바스키아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러니까 1-2년 정도 됐던 때 같다. 나는 매일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나만의 화풍이라는 것은 평생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만난 어떤 갤러리 대표님께 그런 이야기를 짧게 한 적이 있는데, 많이 그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만의 색이 생길 거라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피카소가 떠올랐다. 피카소의 다양한 그림들은, 아니 전혀 다른 그림들은 도대체 뭘까.
그 후로도 나는 나의 색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까만 선을 좋아하고, 색을 사용하는데에 재미가 있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나의 느낌이 있다고 했었지만, 나는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났고, 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그림을 그리다가 점점 비슷한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다가는 다시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렸고, 새로운 방향에서 다시 비슷한 그림들을 그렸다.
몇 번의 그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다. 나는 어떤 때에 거의 갑자기 어떤 형태의 유사한 그림들을 그려댔고, 그리 오래 가지 않은 채로 또 다른 형태의 그림들을 그려댔다. 특정한 짧은 기간 동안에 그린 그림들 사이의 유사성은 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주(라고 하지만 실은 cosmos라고 하는 것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좀 더 가깝다)를 그렸다.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들이 10점을 넘어섰다. 그렇게 나의 그림이 잡혀가나했지만, 나는 또 다른 그림들을 그리고 있고, 그리고 싶다.
화풍이라는 것은 신기한 단어다. 그 사람만의 개성을 뜻하면서, 왠지 거기에 갇히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색이라는 단어와 자기 복제라는 단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알 것 같으면서도 말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나는 앞으로도 뜬금 없는 그림들을 그리지 않을까 싶다. 반복되는 형태는 질릴 거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태 그려온 것들과 다른 모습의 그림이 떠오르면, 그리고 그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나는 그것을 그릴테고, 그럼 여태 그려오던 것과는 그다지 비슷한 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걸 진화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모쪼록 날이 풀리고 있는데 일교차가 큽니다. 항상 몸과 마음 건강 잘 챙기세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