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핀드로 Aug 05. 2022

번식은 본능일까? 생존전략일까? <상>

결혼하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깨달은 점

학창 시절 교과서에는 생존과 종족 번식이 생물의 본능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얘기하니 그러려니 생각해 왔다. 이제 생존이 본능이란 점은 쉽게 이해가 된다. 나 자신에게도 생존 욕구가 엄청 강하게 존재함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와이프가 화낼 때.


***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투자해야 하고 때론 심각한 리스크까지 감수해야 하는 번식. 번식은 과연 무조건적인 생물의 본능일까?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 결혼하지 않는 사람, 자녀를 갖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본능을 억제하고 있을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생물의 번식은 수학적인 계산 결과에 따른 선택이 아닐까?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한 몸 먹고 살기 힘드니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천 년 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시대다. 심지어 네안데르탈인보다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 용적이 더 작다. 이는 신경 바짝 쓰지 않고도 살 만한 환경이란 의미다. 그런데도 번식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자녀를 낳는 것이 본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즉 번식은 부모 개체들의 생존 전략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부모는 자녀를 낳을 경우 투입해야 하는 에너지와 자원을 계산한다. 그리고 자녀가 자신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계산한다. 그리고 두 숫자를 비교해서 밑지지 않는다고 판단되야 아이를 낳는다. 반대로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출산을 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생물에게 공통이며 아무리 고도화된 정신 문명(?)을 갖고 있는 현대 인류라고 예외는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단세포 생물들과 다세포 생물들 중 일부는 무성 생식을 한다. 무성 생식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바로 분열법이다. 분열법은 그냥 몸을 두 쪽으로 쪼개는 방법이다. 생각만해도 고통스럽고 리스크가 높아 보이는 번식 방법이다. 


 사실 인간도 그렇지만 모든 번식에는 큰 고통과 리스크가 따른다. 거의 매일 알을 낳는 암탉도 한참을 몸서리치다가 알을 낳는다. 이 고통에는 다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번식하지 말고, 고통과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더욱 신중하게 따져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런데 왜 단세포 생물은 분열을 시작했을까? 최초의 분열이야 의도치 않은 우연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반복되는 분열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 깨달음 이후의 번식은 분명히 생존을 위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파트너와 힘을 합쳐 다른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해, 쫓아오는 포식자에게 파트너를 내주고 도망가기 위해, 천적의 눈길을 두 갈래로 분산시키기 위해, 양방향으로 갈라져 먹잇감을 탐색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유들로 자신과 비슷한 개체를 주위에 두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다. 그래서 의도적인 번식을 하는 종만 살아 남았다. 


 이제 수억 년의 시간이 흘러 번식의 방법은 다양해졌다. 그래도 번식의 근본적인 목적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 사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는 생물들에게 단 1초의 작전타임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무성 생식이 아니라 인간처럼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이 생겨났을까? 암수 또는 남녀간 만나 번식하는 것에는 무성 생식과 달리 성스럽고 아름다운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실 유성 생식이라고 무성 생식과 별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성생식은 무성생식에 비해 오히려 몇가지 단점이 있다. 일단 유성 생식은 힘들게 짝을 찾아야 한다. 번식의 속도도 무성 생식보다 훨씬 느리다. 그래도 많은 생물들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유성 생식을 선택했다. 돌연변이를 더 많이 유발할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성생식의 후손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즉 유성 생식을 통해 생존력이 더 강하고 유전적으로 다양성을 갖춘 개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개체들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집단을 지켜줄 튼튼한 방어막이 되어 준다. 또 생존에 불리하게 환경이 변해도 살아남아 집단의 유지에 도움을 준다. 무성 생식이 인해전술이라면 유성 생식은 소수 정예 전략이다. 그래서 부모 개체는 훨씬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투입해서 유성 생식을 한다.


 인간은 수백만년에 걸친 성공적인 유성 생식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유전자 속 정보는 유성 생식을 통한 번식을 마치 절대무공의 비급처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생존과는 달리 번식은 주변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의 모든 생물들이 번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일부러 번식을 안 하는 삶을 선택한 생물종과 생물 개체들도 무척이나 많다. 대신 바로 자신의 세대에서 멸종해 버려 후손과 화석이 우리 눈에 안 뜨일 뿐이다.


 다른 동물은 몰라도 무한한 부성애와 모성애를 몸소 느끼는 인간들에게 이런 말은 적용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가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는 애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을 보면 정말 무한한 사랑이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물론 가끔씩은 그렇지 않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출산이라는 것이 생존 못지않게 매우 강한 본능이며 때로는 출산을 위해 생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개체다. 개체란 다른 개체와 물리적으로 구분되어 있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며, 무엇보다 생사를 달리하는 존재다. 특히 생물 한 개체는 ‘세포들로 이루어진 이기적 이익 집단 중 운명을 같이 하는 가장 큰 단위‘를 말한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한다. 


 우리는 아무리 자신과 닮았다고 해도, 오래 같이 살았다고 해도 다른 인간의 정보를 똑같이 복사하듯 받아들일 수 없다. 즉 다른 인간과는 감각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교환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뿐, 다른 인간의 신경계 속 정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 사이거나, 쌍둥이 사이거나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는 유전 정보의 일부만 공유하고 있을 뿐, 물리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세포 한 조각, 원자 한 톨도 없다. 즉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개체이며 따라서 운명 또한 완전히 달리하는 존재다. 


 인간은 여러 신체 기관과 60조 개가 넘는 세포로 구성된다. 이 신체 기관과 세포는 말 그대로 운명 공동체다. 인간 개체가 죽으면 그 안의 신체 기관과 세포도 연이어 죽어서 원자 단위로 흩어진다. 이런 흩어짐을 막으려는 것이 생명이고 그를 위해 하는 행동들이 모여 우리 인생이 된다. 


 생존은 인간 개체를 이루고 있는 신체 기관들과 세포들이 갖고 있는 본성의 산물이다. 다른 개체의 신체 기관과 세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각 인간 개체는 자신의 이익, 즉 생존 유지를 위한 행동만 한다.

 그러므로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부모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도 자녀의 세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와 부모 사이에 물질적으로 전혀 존재하지는 않는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 이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이란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실존하는 감정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얘기에 앞서 충격 완화를 위해 먼저 식물의 번식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리는 식물과 동물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역시 큰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인간중심주의에 따른 편견일 뿐, 실상 그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특히나 생물이 번식하는 목적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전혀 다르지 않다. 


 식물과 동물은 아주 오래전인 선캄브리아대 즈음에 서로 생존 전략을 달리 택했다. 그래서 진화의 방향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다. 하지만 진화의 방향을 달리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동물은 움직이는 것이, 식물은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생존을 유지하는데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동물과 식물은 생존 방식이 다를 뿐이며 궁극적인 본성에는 차이가 없다.


 식물은 동물의 두뇌처럼 사고를 전담하는 신체 기관이 없다. 그로 인해 동물에 비해 하등 생물로 취급받는다. 과거에는 식물이 씨를 뿌리고 번식을 하는 것에 아무 목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기상 변화처럼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겼다. 심지어 식물은 상대적으로 고등 생물인 동물, 특히 인간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의 선물’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식물은 인간을 비롯한 여러 동물들과 똑같은 세월을 지구에서 보낸 동급생이다. 우리와 같은 교실에 있는 식물들은, 탈락자가 수없이 많았던 고난도 시험 과목 '변화하는 지구에서 살아남기'를 동물들과 동등한 성적으로 통과한 실력자들이다. 단 이 학원, 저 학원을 다니는 대신 교실의 자기 책상에서 독학을 했을 뿐. 따라서 생존 실력에는 동물과 전혀 차이가 없다(인간은 이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식물을 막 괴롭혀도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은 동물보다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 수초나 플랑크톤처럼 서식지를 옮기는 식물도 있기는 하나, 거의 대부분의 육상 식물들은 한번 가지나 뿌리를 뻗치고 나면 다시 회수하기가 쉽지 않다. 또 한번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면 곧 다른 식물과의 햇빛 쟁탈전에 뒤쳐진다. 무심코 만들어낸 꽃향기가 천적인 초식 동물이나 곤충을 불러들여 온몸을 몽땅 먹혀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식물은 절대 쓸데없는 움직임이나 필요치 않은 화학 물질 생성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중한 식물들이 자신이 가진 생존 자원의 상당 부분을 번식에 투자하는 것은 무언가 확실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들판에 사방팔방으로 씨를 퍼뜨리는 것이 식물의 무조건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동물이라 식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식물 개체가 번식을 하는 목적은 바로 개체의 이익, 즉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결과다. 


 식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초식 동물과 초식 곤충 같은 천적, 주변의 같은 종 또는 다른 종의 식물들, 가뭄, 홍수, 산불 등의 자연 재해, 햇빛과 토양 속 양분과 수분의 고갈, 세균, 바이러스 등이다. 이중 다행스럽게도 햇빛, 수분, 양분은 자연계에 비교적 풍부하다. 게다가 햇빛과 땅속의 양분은 대다수 동물들에게는 그다지 중요치 않는 생존 자원이므로 이웃한 식물하고만 경쟁하면 된다. 


따라서 이를 두고 경쟁을 하긴 하지만 이 자원들은 극적으로 사라지거나 남김없이 뺏길 리는 없다. 또 자연 재해는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서 버티는 것을 택한 식물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하기로 작정한 부분이다. 그래서 강풍, 폭우, 저온, 고온 등에도 제법 견뎌낼 수 있도록 식물 구조가 적절히 진화했다.


 그렇다면 식물 입장에서는 천적인 초식 동물이나 초식 곤충에 의한 공격이 가장 무섭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초식 동물이나 초식 곤충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 짧은 시간 내에 별다른 방어 수단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물론 어떤 식물들은 초식 동물이나 초식 곤충에게 화학 물질, 가시, 끈끈이 같은 특수한 구조체로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은 맷집을 키워 어느 정도 먹혀도 다시 재생을 하는 방어 위주의 전략을 펼친다. 즉 몸의 일부를 초식동물에게 쉽게 내주고 재생의 핵심이 되는 부분만 지키려고 하는, 이른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초식 동물이 실컷 배를 채우고 떠날 때까지 살아남아 버티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먼저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 것이 한가지 생존 전략이 될 수 있다. 식물의 덩치가 크면 키가 작거나 입이 작은 초식 동물은 먹을 수가 없다. 또 초식 동물이 아무리 양껏 먹더라도 식물 전체를 다 먹기 전에 배가 불러서 다 못 먹고 남기게 된다. 식물이 키를 높여 높은 곳에 가지를 뻗는 것도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그러면 키 작은 초식 동물은 입맛만 다시다가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식물의 덩치가 커지면 생존에 불리한 면도 생긴다. 덩치를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영양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 큰 덩치 때문에 오히려 초식 동물의 눈에 잘 띄어 먹잇감이 되기 쉽다. 따라서 자신과 유사한 식물 개체를 주변에 많이 생기도록 해서 초식 동물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전략이 유효하다. 자신 주변에 자신과 유사한 외양, 영양, 맛을 갖고 있는 식물이 많다면, 그에 반비례하여 자신이 초식 동물의 먹이가 될 확률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식물은 자신의 씨를 주변에 퍼뜨린다. 그것도 가급적 자신과 비슷한 형질을 갖게 한다. 씨가 자라서 자신과 비슷한 식물이 되면 초식 동물이 먹잇감으로 자신을 선택할 확률을 낮출 수 있다. 이렇게 씨를 퍼뜨려 공격당할 확률을 줄이는 생존 전략을 택한 종들은 집단 군락을 형성한다. (이는 인간을 상대로도 유효한 전략인데, 하나가 있으면 잡초라고 뽑아버리고 여럿이 있으면 들풀이라고 예뻐한다.) 


 그런데 어떤 식물은 이와 반대로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씨를 날려보내는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자신과 유사한 형질을 지닌 식물 개체들이 많이 존재한다면, 초식 동물이 그쪽으로 가고 자신 쪽으로는 안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식물의 번식에는 후손과의 협업이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초식 동물이 아닌 주변 다른 식물과의 경쟁에서도 번식은 도움이 된다. 숲 속의 식물들이 온순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이들은 주변의 다른 식물들과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쉼없이 벌이고 있다. 가지를 뻗어 햇빛을 공중에서 차단하는 공중전을 벌이기도 하고, 땅속에서 뿌리를 공격하는 지하전을 펼치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식물에게 치명적인 화학 물질을 내뿜고, 주변의 토양을 자기만 살 수 있도록 화학적으로 변형시키는 화생방전도 벌인다. 이런 치열한 전투에 자신이 없는 식물은 아예 다른 식물들이 탐내지 않는 척박한 땅으로 피신을 가서 산다.


 이런 경쟁에서 승리하여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군을 늘려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자신과 유사한 형질을 갖고 있는 아군이어야 유리하다. 식물은 번식을 통해 자신과 유사한 후손을 가능한 많이 만들어낸다. 협업이 가장 용이한 존재가 바로 자신과 유전자 정보를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는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 후손들을 많이 번식시켜 주변의 적과의 싸움에 한 몫 할 때까지 양육하고, 또 그 후손들이 또 후손을 낳아 더 강한 생존 경쟁력을 갖춘 집단이 되도록 한다. 


 그런데 후손이라고 협업의 대상만은 아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협업 관계이면서 동시에 경쟁 관계다. 그래서 때론 제한된 생존 자원을 두고 후손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도 한다. 사실 가족끼리의 생존 경쟁은 드물게 발생하더라도 일단 발생하면 매우 치열하다. 왜냐하면 유전적으로 가까울수록 필요로 하는 생존 자원 또한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후손은 자신과 비슷한 지능, 전략, 구조를 갖고 있다. 다른 생물을 상대할 때 쓰는 공격과 방어 전략은 잘 먹히질 않는다. 즉 후손은 제일 까다로운 경쟁자이기도 한 것이다(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백 년 된 고거수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500년 된 고거수라면 근처에 그 나무의 후손, 즉 450년이나 420년쯤 된 나무들도 여럿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 비슷한 수령의 고거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즉 나이 많은 고거수가 주변의 모든 생존 자원을 독차지하여서 후손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보살핌도 생존 자원의 일종이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우는 은행나무는 장수하는 나무 중 하나다. 가을마다 수많은 은행나무 암컷이 은행을 맺지만 인간의 손길 없이 자라나는 어린 은행나무는 없다. 과거 수십 종의 은행나무 종들이 있었으나 이제 지구상에 단 하나의 종만 남아 있다. 그래서 은행나무문, 은행나무강, 은행나무목, 은행나무과, 은행나무속 은행나무종으로 분류된다. (인간도 Homo종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다. 하지만 은행나무에 비하면 한참 하수다.) 후손이나 동족과의 협업을 거부하고 경쟁을 통해 혼자 생존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생하는 은행나무 군락지는 지구상에 거의 없다.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심어주는 인간이 멸종되면 같이 사라질 운명이다. 은행나무와 달리 삼나무와 같은 고거수들은 집단 군락지를 이룬다. 일정 거리를 두고 같이 살면서 협업과 경쟁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그럼 식물의 후손은 부모를 위한 희생양일 뿐인가? 그렇다면 별다른 능력 없이 동물에게 먹히기 좋은 후손을 일방적으로 찍어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부모와 비슷하거나 더 우수한 형질을 갖도록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투자할까? 


 이는 우수한 생존 능력을 가진 후손과의 협업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후손이 또 다른 후손을 계속해서 번식시키면 군락이 확대된다. 그럼 그 안에 속한 자신의 생존 확률은 계속 높아진다. 또 번식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후손에게 우수한 번식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식물의 번식도 무조건적인 본능의 산물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번식은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를 철저하게 계산한 후에 비로소 수행하는 대형 투자 사업이다. 특히 후손은 최고의 협업 파트너이지만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


작가의 이전글 변화의 속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