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전히 진화하고 있을까?
몇 년 전, 아이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때 경기도 연천에 있는 선사 유적지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인간의 진화에 대해 설명하는 큰 그림판이 있었다. 키가 작고 허리가 굽은 원인부터 현생 인류까지 줄줄이 걸어가는 바로 그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보고 아이들에게 인간이 이렇게 진화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아빠의 아빠의 아빠는 이렇게 원숭이처럼 생겼었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해줬다. 앞으로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보면 예의를 갖춰 인사하라고 일러줬다. 그 이후로 나에게 인사를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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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굽은 원인부터 허리를 쭉 편 현생 인류까지 일렬종대로 세워놓은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화의 개념을 종종 착각하게 만든다.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뒤쪽에 서있는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약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기 전까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상에 같이 살고 있었다. 마치 불도그와 푸들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다가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 기후 변화, 이종 교배의 영향 등으로 인해 멸종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소수의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하며 아직 살아남아 있다. 불도그가 치와와를 다 물어 죽이고 몇 마리만 남겨서 믹스견을 낳았다고 보면 된다.
현생 인류의 다음 칸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간은 더 이상 진화가 불필요할 만큼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이 순간에도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연 몇 십만 년 뒤 우리의 후손들은 그 칸에 어떤 인류를 그려 넣을까?
진화에는 변이가 필수적이다. 부모와 모든 것이 똑같은 후손이 나오면 진화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우리와 우리 후손 사이에도 변이는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진화는 계단처럼, 때론 미끄럼틀처럼 발생하기에 그 변화를 감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미끄럼틀도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계단이고, 계단도 멀리서 보면 미끄럼틀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떤 진화가 발생하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나중에 창조론자들이 그 존재를 부정하는 중간 화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인간이 더 이상 진화할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인간 중심 주의에 의한 큰 착각이다. 진화는 주로 돌연변이에 의한 큰 변이를 통해 일어난다. 하지만 주변 환경 변화에 의한 점진적인 변이도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20세기 이후부터 인간은 스스로 주변 환경을 크게 바꾸었다. 그 덕에 전보다 빠르게 진화하지 않고서 살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눈에 보이는 신체의 진화보다 보이지 않는 신경계의 진화는 훨씬 더 빨리 일어나고 있다.
후성 유전학에 따르면 부모가 살아가면서 습득한 정보의 일부가 후손에게도 전달된다고 한다. 전달되는 정보는 별 쓸데없는 정보가 아니라 생존에 중요한 정보로 엄선될 것이다. 그런 정보는 우리의 의식과 신체에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는 누적된다.
과거 흑백 사진 속의 우리 조상들과 현재 젊은이들의 외모를 비교해보면 도저히 같은 민족이라고 믿기 어렵다. 내가 보기엔 선사 유적지에 있던 그림판의 한 칸만큼의 큰 차이다. 얼굴 골격, 키, 신체 비율 등의 차이가 확연하여 이것은 가히 진화라고 부를 만하다. (즉 얼굴, 키, 신체 비율이 생존에 중요한 시대다.)
사실 눈에 보이는 신체보다 신경계가 더 큰 폭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아마 신생아가 태어날 때 갖고 있는 정보를 과거의 신생아와 비교하면 분명히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보의 양이 다르면 임신 기간과 신생아 체중도 차이가 난다. 현재도 국가별, 지역별로 임신 기간이 조금씩 다르다. 100년 전과 지금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화를 한다.
물론 다른 생물들도 진화를 하고 있다. 동물들도 가끔 돌연변이에 의해 드문 외형을 갖춘 개체가 태어나고 있고, 식물들도 기형을 가진 개체가 생겨난다. 그런데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생물들은 인간에 의해 강제 진화를 당하기도 한다. 젖이 많이 나오는 소, 살이 빨리 찌는 돼지, 수확량이 많은 벼, 병충해에 강한 사과… 우리는 품종 개량이라고 부르지만 동물과 식물 입장에서는 진화다. 자연스러운 진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인간이란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진화한 것이다.
어차피 진화에는 같은 종, 주변의 다른 종, 자연환경 등이 영향을 미친다. 인간에 의해 품종이 개량된 생물들은 대부분 생존 능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혹시 그들에게 감정이 있다면 인간에게 고맙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잔인한 놈들이라고 욕할 수도 있다.
인간도 진화를 통해 생존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수백만 년 전 허리를 펴고 직립 보행을 하게 되면서 더 멀리 내다보게 되었고, 남는 두 손을 이용해 도구를 이용하게 되었다. (대신 허리 디스크를 얻었다.) 또 피부의 털을 없애고 촉감을 발달시켰다. (대신 옷값이 많이 들게 되었다.) 두뇌는 커져서 기억력이 좋아졌고 미래 예측력도 함께 발달했다. (대신 공부를 하게 되었다.)
현재의 아이들을 잘 살펴보면 기존의 성인들과 다른 점이 많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보는데 최적화되게 자신의 신체를 발달시켰다. 그들의 손은 스마트폰 화면 속 작은 키보드 터치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오타 없이 빠른 속도로 텍스트 입력을 할 수 있다. (내가 키보드 치는 속도보다 빠르다.) 성인들은 한동안 스마트폰을 보면 목이 뻐근하지만 아이들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쳐다봐도 목이 전혀 아프지 않다.
또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볼 때 불필요한 시각과 청각 정보의 유입을 차단하는 능력이 생겼다. 그래서 엄마가 아무리 불러도 전혀 못 듣는다. 대신 박쥐의 초음파처럼 오감을 대체하는 사이버 감각 같은 게 새로 생겼다. 그래서 유튜브 세상 속 변화를 기존 성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감각할 수 있다. 현재 아이들은 신경 네트워크의 구조에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변이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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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화는 공진화라고 한다. 그래서 한 생물의 진화는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생물에게도 이어서 진화를 요구한다. 확실히 우리 아이들은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과 공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엔 애들에게 구형 공짜 스마트폰 말고 최신 스마트폰을 사주려고 한다.
진화를 촉진시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