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
내 주변에는 일부러 일본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일본에 여행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긴 하다. 좋은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일본의 맛있는 먹거리, 영화나 아니메, 특유의 정갈하고 전통적인 분위기, 환대문화, 가까워서 등등. 그런데 일본에 가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는 정해져 있다. “일본이 싫어서.”
싫은 이유는 우리 민족이 과거에 침략과 참혹한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리고 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그래서 일본에 대해 거부감이 들고 일본에서 돈을 쓴다는 게 죄책감이 들어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는 방사능 때문에 위험해서,라는 이유도 생겼다.)
그런 경우에는 일본에 가게 되더라도 죄책감을 더는 방향의 여행을 추구한다. 일부러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고양시키거나 반성하면서 앞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는 교육적인 장소들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면,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에서 참배를 하거나 강제징용의 아픔이 있는 하시마섬이나 임진왜란 귀무덤을 들르는 것처럼 여행의 일부를 다크 투어리즘 화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한 군데 더 들러보면 좋을 박물관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학창 시절에 ‘조선인 퇴치!’라며 때리는 일본 아이들에게 맞으며 ‘왜 나는 조선인인가’라고 슬퍼했던 한 재일교포가 세운 고려미술관이다. 그의 미술관은 슬픈 역사 속에서 고통스러워했던 개인과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자취들을 만날 수 있다.
고려미술관은 교토 북쪽 카미노키시쵸의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았다. 관광객이 많은 중심가에서 버스를 타고 달리기를 30분. 그만큼 평범한 주택가라서 찻길 건너편에는 학교가 있어 아이들의 에너지 넘치는 소리가 들리고, 상점도 거의 없이 조용한 동네의 미술관이다. 그곳은 설립자인 재일교포 정지문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것이다.
주택을 개조한 미술관은 언제나 아담한 규모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을 보여준다. 컬렉션 자체보다도 한 채의 집이 미술관으로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감화하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적인 집이 미술관이 될 때는 유명한 화가의 생가인 경우가 많다. 화가가 살아 숨 쉬며 애착을 느꼈을 공간은 그 화가를 위한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그런데 화가라고 하면 가난에 몸부림치다가 많은 고뇌와 열망을 그림에 녹여냈을 거라는 나만의 선입견이 있어서일까. 생각보다 부유하고 고급스러운 화가의 집에 가면 놀라기도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소로야 미술관에 갔을 때 그런 감정이었다. 심지어 거대한 태피스트리까지 벽면에 걸려있는 것을 보니, 소로야는 살아서 명성까지 가졌던 운이 좋은 화가였다는 걸 알았다.
미술관이 화가의 집이 아니라면 콜렉터의 집이다. 게티 미술관이나 오타니 고즈이의 니라쿠쇼(二樂莊)가 떠오른다. 갑자기 두 콜렉터가 튀어나왔지만 한 문장 안에 나열하기엔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티 미술관은 석유재벌 폴 게티가 말리부에 지은 어마어마한 저택을 미술관으로 활용한 것이고, 오타니는 자신의 별장에 불법 반출한 조선의 미술품을 소장했다.
1988년 10월 25일 개관해서 올해로 35주년을 맞이하는 고려미술관 역시 한 콜렉터의 집이다. 그는 바로 1918년 경북 예천군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정조문이다. 파친코 사업으로 돈을 벌던 그는 1955년 어느 날 교토의 한 상점에서 백자 항아리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흠모하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느꼈다. 첫째는 조선인들을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의 문화를 탐낸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선진적이고 아름다운 문화를 알아보는 일본인들의 미적감각에 놀란 것이다.
백자 항아리를 계기로 정조문은 일본에 흩어져 있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화유산 약 1,700점을 수집했다. 그는 자신만을 위한 사치품이나 취미생활에 돈을 쓰는 게 아니었다. 그가 수집하고 미술관을 세워 전시한 물건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재일교포들과 험난했던 한국의 역사에 바치는 위로였다.
고려미술관 건물에 들어서면 작은 뮤지엄샵이 먼저 눈에 띈다. 박물관에 마음이 가면 기념품을 꼭 사서 두고두고 다시 꺼내 회상에 잠기고 싶은 관람객을 위해서일까? 미술관은 작은 규모인데도 꽤 다양한 굿즈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친절한 직원 분을 통해 500엔을 주고 관람권을 구입하면 슬리퍼로 갈아 신고 입장한다.
반 계단 내려가면 1층 전시공간이다. 그곳에는 정조문의 중요한 컬렉션들, 즉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는 도자기들이라 큰 감흥은 없었지만, 일본인 관람객에게는 도자기의 아름다움이 잘 전달될 것 같다. 그리고 역시 한국인 관람객에게는 오히려 <마상재도>와 같은 그림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1748년 그린 <마상재도>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통신사 일행에 합류한 곡마기수, 마상재와 곡예를 즐기는 당주와 그 부하들이 담긴 그림이다. 1층 전시공간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따로 구입한 아래의 엽서 이미지로 대신한다. 그림에서 재미있는 점은 사무라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억울하고 우울해 보인다는 것이다.
환대를 위해 특별한 공연을 펼치는 기수들을 보면서 왜 표정들이 저럴까? 말 위에 서서 부채를 펼친 기수 말고도 물구나무서기를 한 기수와 얼핏 보면 비보잉을 하는 것 같은 기수 등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면 정말 재미있는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을 텐데.
그런 궁금증을 남기며 계단을 통해 2층 전시공간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고려미술관 개관의 배경에 대해 인터뷰한 영상이 연속으로 상영된다. 영상 속에서 정조문 선생이 남긴 말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남과 북, 부모가 싸우는데 내가 어디에 가겠습니까. 남과 북 어느 쪽에 갈 수 있어도, 다른 한쪽엔 갈 수 없게 되니 이처럼 불합리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곳 교토에서 나의 고향을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섬, 대마도에 가서 조국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가 조국에 돌아가지 않는 걸 선택한 것은 조국을 너무나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미술관의 이름을 ‘고려미술관’이라 지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나라를 통합한 국가이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에서 상징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은 파친코가 사양사업이 되면서 미술관이 경영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도 후원자 모집을 절실히 고대하는 것이 느껴진다. 고려미술관에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이곳이 잘 유지되고 더 많은 전시와 발간 활동을 한다면 타지에서 고향을 꿈꿨던 많은 교포들과 분단된 나라의 고통을 위로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