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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라는 책으로, 나와 우리 집 양반한테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슴 깊이 자리잡고 계시는 유홍준 작가님께서, 30년만의 에세이를 내셨다.
이름하여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인 것이다.
어쩜 이리도 책 제목을 작가님하고 딱 어울리게 만드셨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유홍준’,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이 두 가지만 들어도 너무도 우리한테 익숙한 느낌이다.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어마어마한 책으로 이미 우리들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 글쟁이, 국보급 역마살 유홍준이 “인생만사”답사로 돌아왔다”는 띠지의 설명이, 다른 말을 갖다 붙일래야 붙일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책의 표지 또한 얼마나 귀엽고 재미있던지,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평소 유홍준 교수님을 자세히 지켜봐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의 표지에 실려있는 소품들을 바라보면서 비록 작가님의 얼굴은 실려있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작가님의 상징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유홍준 교수님의 모습은 없지만, 저절로 작가님의 얼굴이 떠올려지는 그런 아이템들로 표지를 예쁘게 장식했다.
늘 편안한 정장 재킷에 중절모 비슷한 모자를 쓰시고, 대한민국 전국을 누비고 다니시는 분답게 편안한 신발을 신고, 에어컨보다는 부채를 사랑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연상이 된다.
그리고 작가님한테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되는 볼펜과 독특한 안경이, 교수님께서 평소에 답사를 하시며 늘 메모를 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습또한 상상할 수 있어서 너무도 정겹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를 쓰신 유홍준 교수님은, 500만부 판매 신화라는 초유의 기록을 만들어내신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로, 이미 대한민국 대표작가님으로도 유명하신 분이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를 내시면서 책 제목옆에 ‘유홍준 잡문집“이라는 부제목을 달으셨는데, 왜 에세이라고 안하고 ’잡문집‘이라고 쓰신 이유에 대한 작가님 설명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흔히들 말하는 에세이라고 하면 뭔가 모를 고고함이라던가 분위기 같은 것이 있는데, 작가님은 그런 우아함보다는, 평소에 잘 부닥치기도 하면서 써내려가 간, 그런 삶의 채취 같은 것을 느끼기 위한 글쓰기 이다보니,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잡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유홍준 잡문집‘이라고 명명하셨단다.
작가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고고하게 나아가는 것보다는 현실 속에 부딪히면서, 거기서 느끼는 삶의 향기와 채취를 고스란히 담고 싶었던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은 문화유산 전도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문화재청장을 지내시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 글쟁이이자, 국보급 역마살 유홍준이 “인생만사”답사로 돌아왔다는 띠지의 설명이 너무도 재미있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이 책은 작가님이 30여년만에 만드신 산문집으로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수십년동안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던 유홍준 교수님의 글쓰기 비법이 함께 수록되어있으며, 작가님의 문장수업의 이력을 낱낱이 공개해주신다.
스스로 ”잡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글 들은 작가님 특유의 촌철살인의 메시지와 교수님의 인간미 넘치는 매력이 넘쳐흐른다.
미국에서 살 때도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기“를 주문해서 읽고 소중하게 보관할 만큼, 우리 집 양반하고 나의 최애작가님이시기도 하다.
그런 작가님의 새로운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리에 사전예약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받아본 책이기에, 더더욱 정감이 간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중하게 얻게 되는 작가님의 글쓰기 비법을 통해서, 나의 글쓰기 또한 향상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누구보다도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오신 유홍준 교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토록 작가님 발자취 하나하나에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나 또한 작가님의 이러한 인생의 지혜를 배워가야겠다.
나의 잡문과 글쓰기
제 1장 : 세상만사
제 2장 : 문화의 창
제 3장 : 답사 여적
제 4장 : 예술가와 함께
제 5장 : 스승과 벗
부록 : 나의 글쓰기
1장의 시작이 너무도 유머러스하다.
‘고별연’이란다.
작가님께서 45년이라는 세월동안 피워오신 사랑하는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우시면서 그 담배를 떠나보내는 고별 이야기이다.
이런 것이 유홍준 작가님만의 반전 매력인 것 같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라는 책이 주는 느낌이, 뭔가 그동안 학자님으로 살아오신 작가님의 약간은 무거운 느낌으로 시작하지 않을 까 싶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담배를 끊게된 사연으로, 아주 캐쥬얼하고 가볍게 독자들을 가까이 불러 앉히신다.
이래서 밀리언 셀러 작가님이신가 보다.
작가님이 담배를 끊게 된 사연또한 너무도 재미있다.
담뱃값이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라고 하신다.
그저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이 하고, 공공의 유해 사범으로 몰아가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담배 피울 곳이 없어서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너무도 처량하고 서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치사해서 끊으신 것이란다.
하지만 여전히 담배를 사랑하는 마음은 남아있기에, 강제로 이혼당한 기분으로 담배를 끊으셨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괜히 짠하고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담배를 피워보지 않아서 그 심정을 그대로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어느정도 헤아릴 수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정말 잘 끊으셨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오래오래 교수님을 가까이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이다.
세상에나, ‘잡초 공적비“라는 것이 있단다.
잡초를 공적이 있다고 비를 세웠다니, 너무도 놀랍고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가끔 잡초에 대한 예찬이나 노래는 들어봤어도, 이렇게 ‘잡초 공적비’까지 세웠다는 소리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다.
평창에 있는 청옥산 육백마지기 생태농장의 노부부가, 생채기 난 흙을 보듬어 치유하는 잡초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는 설명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서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과수원에서는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는 말씀에, 늘 잡초와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집 양반이 떠올려진다.
마당의 잔디 가꾸기를 마치 자식 돌보듯이 하는 사람인지라, 잔디 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잡초를,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만두지를 못하고 기어이 다 뽑아버린다.
그러다보니 우리 집 마당의 잔디는 늘 언제나 파릇파릇하고 잡초하나 없는, 기가막힌 푹신한 잔디를 자랑하고 있다.
과수원처럼 잡초랑 잔디가 공생을 한다면, 이건 보나마나 지는 싸움이다.
잡초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결국 잡초가 잔디를 이겨버리고 만다.
하지만 예쁜 잔디외에는 잡초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는, 잡초 같았던 내 인생도 그다지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구나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쳐본다.
이 세상에서 화초같이 사는 게 아니고, 억센 생명력으로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잡초에 대한 예찬을 듣다보니, 우리네 인생살이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살다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다 잡초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한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잡초 예찬론’은, 뭔가 정한수 한 잔 마신 것같은 그런 청량함이 온 것 같다는 작가님의 표현이 너무도 멋지다.
‘우리 어머니 이력서’라는 글에서 작가님의 어머니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쓰여져 있다.
어머님의 88세 미수연 잔치를 차려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88년동안 살아오신 옛날 생각이 나셨던지, 이제껏 한 번도 작가님한테조차 해준 적이 없었던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유홍준 작가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많이 우셨단다.
1927년 생이신 어머니와 1923년 생이신 아버지께서는, 어머니 쪽에서는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서, 아버지 쪽에서는 일할 며느리를 얻기 위해 한겨울에 급히 혼례를 치루셨단다.
그 옛날, 어르신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고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 같다.
비단 작가님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해방 전후와 6.25 동란 중에 겪었던 고난의 삶을 생생히 전하는 한편의 댜큐멘터리였다고 회상하시는, 작가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대학 시절 작가님의 집은 데모꾼의 아지트였다고 하신다.
이렇게 데모를 하는 많은 친구들이 작가님의 집으로 몰려들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마음이 좋아서였다.
열명이 와서 자고 가도 싫은 내색은 커녕 꼭 아침을 해서 먹여 보내셨단다. 작가님 친구들까지도 진심으로 아들처럼 생각하셨다는 그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지금의 이 삭막한 세상에서, 과연 이렇게 진심으로 챙겨주시는 어머니가 계실까라는 쓸쓸한 생각 또한 함께 해본다.
88세 미수연 잔치에, 작가님 어머님한테 밥을 많이 얻어 먹었던, 그때 그 시절의 학생들이 다 참여를 하셨단다.
어머니께서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농담삼아 출석 체크하듯이 누구누구는 왜 안왔느냐고 하시며 즐겁게 잔치를 하셨단다.
미수연때, 작가님 어머니의 말씀을 같이 듣고 있었던 친구분들이,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단다.
오늘 어머니가 하신 얘기를 꼭 ”일본 답사기‘에 써서,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사셨는지 우리 아이들도 알게 해주고, 일본어판도 나온다니까 일본 사람들도 읽어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이력서‘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께서 영남 대학교 시절에 학생들에게 기상천외한 과제를 내셨단다. 한국 미술사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는 대신, 과제물로 3인 1조로 민속촌 논에 세울 허수아비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수업을 강의실이 아닌 민속촌에서 하기로 하고, 구계서원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학생들이 과제물로 만든 허수아비를 들고 민속촌 논둑길로 들어오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단다.
영상물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그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습의 허수아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X 세대 허수아비의 탄생인 것이다.
X 세대 허수아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허수아비는 찢어져서 꿰맨 헌 옷에 낡은 밀짚모자를 쓴 것이 전부였는데, 세상이 변하다보니 허수아비조차도 멋진 X 세대 허수아비로 바뀐 것이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이제는 이상한 모습의 허수아비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외계인도 있고, 슈퍼맨도 있고, 흰 붕대를 휘날리는 미라도 있으며, 마녀 허수아비까지도 있단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났다.
한 번은 이 작품들이 평택 축제 현장으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단다.
농기구를 이용해서 만든 허수아비의 얼굴에 눈,코,입으로 붙여놓은 조 이삭들을 참새가 다 쪼아 먹는 바람에 이목구비가 없어져 버렸단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면서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참 가관이었던 것이다.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허수아비로 보았네요.
유홍준 교수님 아니면 누가 이런 참신한 과제를 내 놓을 수 있겠는가.
이 시대의 진정한 교수님이시다.
이애주: 다시 없을 인간 문화재 춤꾼
이애주는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이고, 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인간문화재이시다.
하지만 이애주 교수님은 사람들한테 그저 ‘춤꾼’으로 불리기를 원하셨다는 말씀에,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애주님의 춤은, 바로 1987년 7월 8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때의 ‘바람맞이춤’일 것이다.
흰 치마저고리에 머리띠를 동여매고, 멍석말이 속에서 나뭇가지 장단에 맞추어 꿈틀거리며 일어나, 민주열사가 쓰러지면서도 외친 민주화를 온 몸으로 되받으며, 연세대에서 시청 앞까지 맨발로 앞장서서 운구를 인도했던 그 춤인 것이다.
당시의 언론들은 이 낯선 아스팔트 위에서의 춤을 ‘시국춤’이라고 했지만, 그 춤은 이애주님의 말씀처럼,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이 내 몸을 통해 바람맞이 춤으로 나나났던 것이다.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내 몸이 따라갔을 뿐이다‘라는 말씀에, 한 예술인의 영혼이 그대로 담겨져있는 것 같아, 가방끈 짧은 나는 그저 할 말을 잃는다.
이애주님은 몸이 자연과 합일하는 ’자연춤‘의 세계가 이제야 손에 잡힐 듯하다고 느끼실 때, 갑자기 몹쓸 병에 걸려 세상을 하직하셨다.
평생 벗이었던 작가님과 세 분을 불러, ’이애주문화재단‘을 설립해달라고 당부하신 말씀을 따라, 유홍준 작가님이 ’이애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으셨다고 한다.
이애주님의 영정 사진을 모시고 있는 작가님의 얼굴에서, 고인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얼마나 쓰라리셨을까를 미뤄 짐작케한다.
진정한 ’춤꾼‘이셨던 이애주님의 별세를 애도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애주 님이시여,
춤꾼이시여,
나의 누님이시여,
한 생을 같이 살아 행복했습니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부록편에 유홍준 교수님만의 꿀팁을 모아담은 아주 소중한 “부록: 나의 글쓰기”가 담겨져 있다.
유홍준 작가님께서 이번 책에 특별히 자랑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애정을 갖고 만드신 부록이다.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20주년 기념 때, 어느 독자분이 글쓰기에 대한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대로 15가지 정도를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 어떤 기자님이 그거를 그대로 적어서 신문에 올리셨단다.
감사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에, 이번에는 아예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이라고 이름짓고, 하나 하나 예문들을 달고 새로이 만드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유머 감각을 살릴 수 있는가, 그리고 글 속에서 기승전결을 짓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작가님은 늘 제목을 먼저 정하고 나서 글을 쓰신다는 이야기들을 너무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
유홍준 작가님은 답사를 다니실 때마다 둥근 부채를 들고 다니면서, 거기에다 쓸 글을 설계하듯 기본 틀을 적어두고 시간있을 때마다 추가하신단다.
정말로 작가님만이 하실 수 있는 너무도 멋지고 근사한 방법에, . 이 부채를 들고 다니시는 작가님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이 돼서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된다.
아직도 이런 풍류를 지니고 계시는 작가님의 감성이 너무도 부럽다.
글쓰기에 특별한 재주도 없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하나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수도 없이 찾아 헤매고 읽곤 했었다.
유홍준 교수님의 글쓰기 비법은 아마도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평소에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수님이시기에, 이런 작가님이 전해주시는 글쓰기에 대한 팁을 얻고 싶어서, 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바로 사전예약을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 것이다.
작가님의 글쓰기 비법을 그대로 전수만하면 글이 나아지리라는 확신은 없어도, 그래도 어느정도 글의 형식은 배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정성을 다해 읽고 또 읽어본다.
363페이지에 달하는 제법 묵직한 책이지만
그 어느 한 장 그냥 스쳐보낼 수 없을만큼
감동스러운 장면들로 가득차있다.
늘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시 넘기면서
음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