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좌우지간 오래 살고 볼일이다.
칠십 하나라는 나이를 보내면서 이런 근사한 저녁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새해를 몇일 앞둔 어느날, 문득 나는 남편에게 특별한 하루를 제안하고 싶어졌다.
2024년 12월 31일 저녁을 우리만의 특별한 날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는 것이었다.
산방산 근처에 있는 젠하이드웨이라는 곳에 ‘디너풀코스’가 있는데, 너무도 근사해보여서 살아생전에 한 번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칠십이 넘은 할매가 볼상 사납게도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부려가면서 불쌍하리만치 애걸해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세상에나, 남편이 웬일로 그러잖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횡재에 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작전이 먹혀들어가리고는 꿈에도 생각못하고 일단 질러본 것인데, 성공을 했다.
오죽하면 꿈인가 생시인가 잠시 멍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래서 또 하나 배운다.
인생이라는 것은 일단 질러보고 볼 일이라고~~
디너 풀코스라니~~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레는 마음에 옷장을 활짝 열어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주도 살면서 좋은 점 하나는 품위 유지비가 안든다는 점이다. 노상 비바람이 몰아치는 덕분에 특별히 좋은 옷을 입고 나갈 일도 없다보니까, 늘 편안한 캐쥬얼 차림으로 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딱히 옷을 장만하지 않아도 제주살이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이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고르고 골라봐도 마땅한 옷이 없어서, 그냥 있는 것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골라 잡았다.
옷을 골랐으니, 이제는 다림질 차례다.
노인이 될수록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라는 말에, 있는 대로 정성을 들여서 다리미질을 마쳤다.
그리고는 화장대 앞에서 늘 하던대로 간단한 화장을 하고는, 생전 안하던 볼터치를 발랐다. 심하게 앓고 난 뒤라서 그런지, 얼굴에 생기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사한 색깔의 볼터치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어본다.
그리고는 얼마전에 알래스카에서 잠시 들른, 큰 딸이 사준 빨간 구두를 꺼냈다.
빨간 색이 예뻐보이는 순간, 늙었다는 징조라고 그 누군가가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오늘 만큼은 이 빨간 구두를 신고, 오늘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나야 나~~
디너 풀코스 먹으러 가는 사람이야~~
있는대로 멋을 내고, 빨간 구두를 신고 설렘 가득한 발걸음을 내딛는 오늘의 내 모습은, 누구보다도 귀엽고 당당한 할매같다.
오늘 나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산방산과 형제섬이 보이는 멋진 바다뷰를 자랑하고 있는 “젠하이드웨이”를 우리는 가끔 찾아온다.
육지에서 손님이 오면 무조건 모시고 갈 정도로 좋아하는 곳이다.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2층의 매니저님의 극진한 배려가 돋보이는 곳이라서, 거의 외식을 안하는 우리 집 양반도 가끔 한 번씩 들릴만큼 멋진 곳이다.
파스타나 피자, 그리고 아시아 퓨전음식을 아주 깔끔하고 맛있게 한다.
내 눈과 입에는 최고이다.
이곳에서 하루 전날 예약한 손님에 한해서 “디너 풀코스‘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때부터 오매불망 이 요리를 즐기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이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 나이 일흔 하나에, 남편하고의 첫 번째 “디너풀코스”라는 이 엄청난 사실을 눈 앞에 마주하고는, 감동에 벅차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늙어가는 징조인지 요새는 툭하면 눈물이 난다.
그토록 오랜세월을 참으로 무뚝뚝하고 고약을 떨던 사람이, 이토록 자상하고 멋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이 생각이 난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서 이벤트를 만들었다.
신랑 퇴근 시간에 맞춰 있는대로 솜씨를 발휘해서, 다이닝룸에 하얀 테이블보를 씌우고, 가장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고, 그리고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촛불까지 켜놓았다.
미국의 집은, 부자이든 서민이든 집 구조가 부엌에 간단한 식탁이 있고, 다이닝룸이라는 것을 별개로 만들어서 모임이나 파티를 할 때 즐겨 사용하도록 디자인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같이 즐기지 못하고 일만하던 이민 1세대들한테는, 다이닝룸이라는 것은 한낮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였던 것이다.
이런 애물단지를 제대로 멋지게 나도 한 번 누려보자는 생각에서 마련한 것인데, 일 마치고 돌아온 우리 집 양반이 손 씻자마자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한 일이, 바로 양초 아깝다고 촛불부터 끄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산산히 부서진 나의 낭만이여~~”가 시작된 것이다.
그후로 우리 집 식탁은 늘 유리그릇 밀폐용기에 담긴 채로 식탁위에 올려지는 것이 전부였다.
설겆이 하나라도 줄여서 물을 아끼라는 호랑이 남편님의 엄명에, 그렇게도 예쁜 그릇을 좋아하던 나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렇게 고약을 떨던 양반이 이런 근사한 곳에서 멋진 디쉬를 앞에 놓고 함께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꿈만 같았다.
코스 요리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건 식전 빵인 마늘 빵이었다.
디너 풀코스와 일반 식사의 세팅이 약간 다른 것 같다.
평소에는 큰 종이 냅킨이었는데, 오늘은 예쁜 스카프 같다.
평소에도 음식을 주문하면 늘 먼저 나오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기분탓인지 더 맛있었다.
금방 구워서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적당한 마늘향이 입맛을 돋구었다.
이어지는 요리마다 작은 접시와 이름들이 등장했다.
첫 번째 요리는 한라봉이 들어간 리코타 치즈크림과 토마토 가스파쵸였다.
리코타 치즈는 자주 들어서 알고 있지만, 가스파쵸라는 이름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다.
리코타 치즈와 한라봉, 그리고 가스파초가 만나 탄생한 이 놀라운 요리는 보기만 해도 황홀해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바라만보고 먹지 않는다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얼른 포크랑 나이프를 집어들고 이 생소한 요리에 도전을 했다.
바삭한 튀김의 첫 식감이 입안을 감싸고, 곧이어 부드럽게 퍼지는 리코타 치즈의 고소함, 그리고 한라봉의 은은한 달콤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확실히 분위기가 주는 매력이 대단한 것 같다.
평소같으면 아무 생각없이 먹었을 음식들이, 사랑하는 우리 삼식이 아저씨하고의 첫 번째 송년파티라는 이벤트를 진행하다보니, 생전 안하던 요리 감상에 젖어, 딴 세상을 헤매게 한다.
어쨌거나 정말 맛있다.
우리 집 양반은 리코타 치즈가 입에 안 맞았는지 반만 먹고는 나한테 넘긴다.
살짝 불안하다.
두 번째 요리는 단호박 스프였다.
유난히 부드러운 스프를 좋아하는 나는, 평소에도 단 호박 스프를 즐겨 먹는다.
코스 요리이다보니, 많지 않은 양으로 나온 것이 더 마음에 든다.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다보면, 나중에 나올 메인 디쉬를 만나기도 전에 배가 불러서 제대로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편 입맛에 맞나보다.
맛있게 먹는다,
다 먹은 접시를 치우면서 포크랑 나이프를 옆에다 놓았더니, 풀코스에서는 한 번 쓴 것은 바로 치운다는 소리에 우리 집 양반 또 노인네 소리를 한다.
힘든데 그냥 놔두라고~~
세 번째 요리는 샐러드이다.
4가지 버섯이 오리엔탈 소스와 함께 어우러진 이 샐러드는, 양송이, 느타리버섯등 네 가지 버섯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에, 얇게 슬라이스해서 살짝 튀긴다음 치즈가루를 뿌린 색다른 누릉지가 함께 한다.
고소한 파마잔 치즈와 아삭한 루꼴라, 상큼한 방울토마토의 조화는 각 재료의 개성을 맘껏 뽐내고 있는 것 같다.
루꼴라는 너무 길게 잘라서인가, 영 입안에 넣기가 힘들었다.
오리엔탈 소스가 배인 버섯은 양념이 잘 되어 있어서 아주 맛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양반, 버섯은 다 먹었다.
네 번째로 나온 요리는 제주산 딱새우로 만든 태국식 매콤한 새우 요리이다.
새우 너겟이 함께 나온다.
메인 재료인 딱새우는 바삭한 튀김옷에 감싸여 있고, 그 위에 올려진 고수 잎은 신선함을 더해주면서 매력을 있는대로 뽐내고 있는 것 같다.
흩뿌려져 있는 파채는 소스랑 같이 찍어서 먹을 때 더욱더 감칠 맛을 느끼게 해준다.
매콤함이 좀 더 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드디어 우리 집 양반의 얼굴이 살짝 찡그러진다.
반도 못 먹고는 내 앞으로 넘긴다.
갑자기 김치찌개가 생각이 난단다.
못 들은 척 했다.
다섯 번째 요리는 제주산 한치로 만든 크림소스 파스타이다.
가끔 이 집을 찾아올 때면, 주로 라구 파스타를 즐겨 먹었다.
오늘은 크림소스였는데, 내 생각에는 라구 파스타가 훨씬 맛있는 것 같다.
그냥 단품으로 시켜 먹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또 내 앞으로 남편의 접시가 슬며시 다가온다.
나 역시 살짝 김치가 생각이 난다.
여섯 번째 요리는 제철 과일 퓨레를 올린 라즈베리 샤베트이다.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에 입가심용으로 나오는 것이란다.
희한하게도 우리 집 양반이 잘 먹는다.
호박죽 빼고는 영 입에 안 맞아 하더니, 이건 맛있다고 끝까지 먹는다.
아마 새콤하고 시원한 맛에 속이 조금 풀렸나보다.
작은 티스푼정도의 사이즈의 유리병이 얼마나 앙증맞던지, 먹으면서 내내 웃었다.
난, 이것까지 다 먹었다가는 정말로 메인을 못 먹을 것 같아서, 이름 그대로 입가심만 하고 잠시 뒤로 미뤘다.
드디어 메인인 일곱 번째 요리, 구운 가지와 주끼니를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이다.
우리 집 양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안심스테이크와 곁들여진 구운 가지와 주키니, 그리고 농축된 소스가 그려낸 예술 같은 예쁜 접시에담긴 요리를 보면서, 역시 음식은 눈으로 보는 재미또한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 시간이다.
더 이상은 못 먹겠다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는 포장을 부탁했더니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줬다.
제대로 된 접시에 나왔다면 아마도 예쁜 사진이 될 뻔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노부부의 생애 첫 번째 ‘디너 풀코스’가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채 막을 내렸다.
오늘 이곳에서 즐긴 디너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식사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중한 행복을 발견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거의 평생을 고생만 하다 늙어가는 것 같아서 속상할 때도 많았고, 아주 가끔은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혼자서 영혼의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고 싶다는 당치않은 소원을 빌어보기도 했지만, 오래 살다보니 이런 황홀한 순간도 오게 된다.
남편의 일순간의 변덕이라도 좋다.
일순간의 변덕이 언젠가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횡재를 가져다 줄 지도 모른다는 야무진 희망을 품어본다.
좌우지간 오래 살아야겠다.
그래야 이런 기적도 맞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나이 일흔 하나에 처음으로 경험한 디너 풀코스는 그 자체로도 특별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곁에서 같이 웃고 어색해하던 호랑이 남편님덕에 더욱 빛났던 것 같다.
우리 집 양반이 변한 것 같다.
그전 같으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아예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먹다가 이상하면 짜증을 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오늘은 끝까지 나를 위해서 잘도 참아줬다.
마지막 디쉬를 끝내면서 하던 말에 나도 모르게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온 것이란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아프느라고 고생했고, 고약한 자기 비위 맞추느라고 고생 많았다면서, 오늘은 그에 대한 포상이라고 한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남편의 이 말 한마디에, 그동안 쌓여있던 원망과 설움이 한꺼번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다소 늦은 경험이었지만, 2024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아름답게 보냈으니, 나는 웬지 다가오는 2025년이 더욱 행복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늦게라도 행복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오늘이다.
아마도 오늘의 이 행복한 경험은, 두고두고 내 남은 노후 인생에 평생 남을 이야기로 남을 것이고, 그 덕분에 새로운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간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