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 행복한 노후
수백억이 넘는 거액을 조용히 기부하고도, 끝끝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신 김장하 선생님!
그분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진짜 어른이란 바로 이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에, 이 감동을 혼자만 간직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넷플릭스에서 “어른 김장하”다큐멘터리를 두 번이나 보았지만, 그 깊은 울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오르는 감정을 더 오래, 더 깊이 간직하고 싶어, 선생님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김주완 작가님의 책 [줬으면 그만이지]를 찾게 되었다.
당연히 바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예상치 못한 인기에 깜짝 놀랐다.
한강 작가님의 책은 노벨상 수상 이후 일주일 만에 열 권이나 손에 넣을 수 있었건만, 2023년 1월 1일에 출간됐던 [줬으면 그만이지]는 사전 예악을 하고 무려 보름이나 기다려야 했다.
이쯤되면 ’역주행‘이라는 단어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원래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리뷰를 남기려 했지만, 25일까지 기다리면서 지금의 벅찬 감동을, 그냥 품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마음을 담아 써보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깊이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 인생에서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이후로 새롭게 느껴보는 설렘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지금, 한 권의 책을 기다리며 다시금 “진짜 어른”의 삶을 되새기고 있다.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진주 지역에서만 조용히 알려져 있었다.
이 위대한 인물을 세상에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다름 아닌 김현지 PD였다.
어느 날,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였다.
한 오십대 남성이 자신이 다니던 모교의 이사장을 자랑하는데, 그 이야기는 김PD가 생전 처음 듣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100억이 넘는 학교를 키워 아무 조건없이 국가에 기부하고, 평생 동네 사람들을 조건 없이 도우며 살아온 한 사람.
정작 본인은 그 흔한 자가용 하나 없이, 오래된 자전거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약방 주인, 김장하 선생님이셨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런 삶을 살아오고도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김현지 PD의 마음은 움직였다.
그 길로 다큐멘터리 기획서를 써내려 간 것이다.
“주인공 없는 인물 다큐는 가능하다.”
“꼰대를 혐오하는 시대,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어른을 기다리는 시대”
배짱은 아주 좋았는데, 설득력은 부족했던지 그 기획서는 무려 2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묵혀져야만 했다.
그러나, 때가 오면 길도 열리는 법이다.
마침내 제작 승인이 떨어졌을 무렵,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단다.
김장하 선생님이 60년이나 나눔을 실천하셨던 ‘남성당 한약방’이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남성문화재단 해산, 진주가을문예 마지막 시상식등 어르신이 참석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식 행사가 이어졌고, 그 덕분에 평생 지역을 위해 헌신한 선생님의 은퇴를 직접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획 초반에는 워낙 인터뷰 자체도 거부하시고, 절대 표면으로 나타나려고 하지 않으셔서 영상 자체를 찍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는데,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때마침,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책을 쓰면서 김장하 선생님을 짧게 취재했던 김주완 작가님도 은퇴를 하는 참이어서, 협업이 가능했단다.
그리하여, 주인공 없는 다큐멘터리, 그대신 중간중간 김주완 작가가 등장해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 완성이 된 것이다.
이름하여,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탄생했다.
김현지 PD는 이렇게 말했다.
“방송이 인물 소개에 중점을 뒀다면, 영화에서는 김장하 선생님의 유머 감각과 소탈한 생활 태도 등이 들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어른 김장하”에는 어르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식 인터뷰는 아니더라도, 김주완 작가님이 묻는 질문에는 간간이 답하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시는데, 그 안에 오롯이 진심이 담겨져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와준 장학생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같은 질문에는 아예 굳게 입을 닫으신다.
취재진의 답답해하는 숨소리가 느껴지는 것을 보는 재미또한 솔솔하다.
이 모든 노력 끝에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제 59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에서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지역 방송 최초의 쾌거이자, 진정한 어른 한 분의 삶이 세상에 제대로 조명받은 뜻깊은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인물 다큐로 시작했던 작업이었단다. 하지만 취재를 거듭할 수록 김현지 PD는 이 이야기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진정한 어른의 의미, 그리고 진정한 나눔의 가치에 대한 아주 특별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베풀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숨기려 했던 김장하 선생님의 삶은, 카메라 앞에 담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지 PD와 김주완 작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선생님의 한약방을 찾아가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을 벗어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일대기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미스터리를 풀어가듯 김장하라는 어른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제작진은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의 삶처럼, 다큐도 소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진심 어린 노력이 담긴 “어른 김장하”는 결국 2023년,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되었고, 넷플릭스에서도 공개되면서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놀랍게도, 2025년 4월, 다시 한 번 전국 극장에서 재개봉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벌써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어른 김장하”라는 영화가 다시 상영이 되기 시작했는데, 이곳 제주도에서는 감감 무소식이다.
이럴 때 한번씩,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가 유독 답답하게 느껴지곤 한다.
“어른은 없고 노인만 있다.“
이 말이 마음에 깊이 박혔었다.
진정한 어른이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불안감 속에서 ”어른 김장하“는 가슴 벅찬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 역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이토록 각박한 세상에 여전히 ”이런 분이 계신다“는 그 사실이 마치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김장하 선생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커다란 위로였던 것이다.
소통은 점점 더 단절되어가고, 사람들과의 갈등은 깊어져만 가며, 진정한 어른은 점점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SNS에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쁜 세상 속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이름도 없이 베푸는 어르신의 모습은 세상에 가장 따뜻한 빛을 전해주는 존재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는 것이다.
슬퍼서가 아니라,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저 고맙고 먹먹해서 우는 것이다.
김장하 선생님은 경남 사천의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다.
워낙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까지만 겨우 다닐 수 있었고, 그 후에는 삼천포의 어느 한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틈틈이 독학을 하셨단다.
그러던 중, 18세가 되던 해에 한약업사 시험에 도전을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 졸업 후, 한약종상에서 3년 이상 실무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졌는데, 선생님은 그 조건을 채워 당당히 시험을 치른 끝에, 합격 소식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뜻밖의 곳에서 생겼다.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응시 당시 나이가 만 18세여서, 그 시절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였기에, 당장 허가증을 발급 받을 수는 없고, 대신 다음해에 주겠다는 답변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에 있는 것 처럼, 한약업사 자격증은 1962년에 따셨고, 한약업사 허가증은 1963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은 1963년에 불과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한약방을 개원하게 된다.
열여덟의 나이에 시험에 합격한 일은 아마도 그때까지 전례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선생님이 바로, 최연소 합격자였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고향인 사천에서 한약방을 열었지만, 이후 진주로 자리를 옮기신 김장하 선생님은 그곳에서 무려 50년 동안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진정한 나눔의 삶을 실천하셨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찾아오면, 아무 조건 없이 무료로 약을 지어주시고, ‘박리다매’라는 원칙 아래 약값도 터무니없이 낮게 받으셨다.
그러나 단지 싸기만 해서 환자들이 몰려든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직원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싸다고 새벽 첫차 타고 그 먼데서부터 사람들이 오겠어요?, 먹고 낫고, 효과를 보니까 소문이 나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거죠.“
그뿐만이 아니다.
직원들에게는 다른 한약방보다 두 배 이상의 월급을 주셨단다.
왜 갑자기 양파가 생각이 날까?
선생님에 대한 미담은 까도 까도 끝이 없다.
그 당시에는 한의사라는 것이 대단한 기술이어서 기술료가 상당히 비쌌는데, 어르신은 이런 기술료를 낮추고 최대한 환자들한테 싸게 해 주신 것이다.
요즘에는 무슨 검사 하나를 받으려고 하면, 수납에 가서 먼저 돈부터 내야한다.
의료가 ‘치료’보다 ‘청구’가 먼저인 시대다.
요즘 의사들이 이런 것을 본받아야 할텐데…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으니, 이런 돈을 결코 함부로 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나눔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으셨단다.
그 소중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 결국 선생님은 그것을 모두 사회에 되돌려주셨다.
그리고 기가막힌 “어른 김장하”의 명언이 탄생을 한다.
“원래 돈이란 똥과 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놓으면 좋은 밑거름이 된다.“
이보다 더 분명하고 지혜롭게 ‘돈’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 또 있을까.
어르신의 나눔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넘어 하나의 ‘숭고함’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분을 불교의 수행처럼 “무주상보시 (無主相布施)”를 실천한 분이라 일컫는다.
‘무주상보시’란,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조차 없이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어르신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 정신을 살아내신 것이다.
김장하 선생님의 가장 위대하고도 도저히 닮기 어려운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생색내지 않음”이라고 한다.
그분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를 한다.
”어르신께서는 단 한번도 생색을 낸 적이 없으며, 훈화의 말 한마디라도 건네신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언론 인터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고, 자신의 공적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저 조용히,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요즘 세상은 무엇을 하든지간에 생색을 내느라고 정신이 없다.
도움을 주면서도 ‘기록 남기기’와 ‘홍보‘가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자식들조차도 있는대로 생색을 내느라고, ”차라리 안 받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생색 내지 않기” 챌린지가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말 없이 베푸는 사람, 조용히 돕고 돌아서는 사람, 아무 대가 없이 따뜻함만을 남기는 사람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챌린지.
그 누구보다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게 이 세상을 밝힌 한 어른, 김장하 선생님이 바로 그 챌린지의 상징이 아닐까.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조용히 길을 걷는 평범한 노신사, 문형배 재판관이 가장 존경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도 거절한 분! 바로 김장하 선생님이시다.
겉으로 드러난 기부액만 해도 무려 3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록으로 남은 숫자일 뿐이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수많은 나눔까지 더한다면, 그분이 평생 베푼 사랑은 금액으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장하 선생님은 늘 같은 마음을 간직해 오셨다.
어르신께서 남긴 말 한마디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힘이 된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는,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했으면 한다.”
이 얼마나 담백학고도 숭고한 말인가.
어떤 생애는, 수많은 찬사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는 고요한 존중”앞에서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문형배 재판관님을 보고 있노라면,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진 존경과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르신한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조촐한 생일 잔치를 열어드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평소에 생일 축하도 사양하시고, 관심이 쏠리는 자리는 피해 다니셨기에 혹시 미리라도 알리면 또 어디론가 숨어버리실까 걱정되어 “꼭 봐야 할 공연이 있다”며, 죄송스럽지만 슬쩍 속여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 그 자리에 문형배 재판관님도 함께 했다.
그리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는 그날의 장면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담겨 있다.
재판관님의 떨리는 목소리,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끝내 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던 순간의 장면들, 나 역시 그 울먹이는 모습에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가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한 마디 속에, 스승에 대한 깊은 감사와, 평생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온 존경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문형배 재판관은 재판관 임명을 앞둔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저는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생이었습니다.”라고 당당히 밝혔다.
고둥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선생님이 주신 장학금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이어 문형배 재판관님은, 김장하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바를 사회에 갚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헌법 재판관이 되더라도 그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사법고시에 패스를 하고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자기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제가조금이라도 이 사회에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건 김장하 선생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말 한마디가 한 제자의 삶을 바꾸고, 그 제자는 다시 사회에 조용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
두 분의 만남 자체가, 이 각박한 시대에 조용히 그러나 깊이 한 줄기 빛을 밝혀준다.
존경이 전해지고, 그 존경이 또 다른 존경을 낳는 아름다운 울림.
그분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어른다움”이라는 등불을 다시 켜게 만든다.
김장하 선생님은 평생 가슴에 남아 있던 가난의 설움을, 자신의 세대로 끝내고 싶어 하셨다.
공부하고 싶었지만 형편 때문에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던 아픈 기억은, 오히려 ‘누군가의 배움’을 돕는 큰 뜻이 되었다.
‘나처럼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 마음 하나로, 선생님은 사재를 털어 ”명신 고등학교“를 세우셨다.
그저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직접 세우셨다.
1. 친인척 채용 금지
2. 돈을 받고 교사 임용 금지
3. 권력에 굴하지 말 것
이 원칙은 선생님의 평생 신념이 고스란히 담긴 약속이었다.
교육이 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학교가 누구의 사유물도 아닌 ’공공의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를 설립한 지 8년 만에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아무 조건도 없이 명신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하셨다.
선생님께서 남긴 말씀은 듣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걷은 이운이었기에,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보다, 더 많은 이들이 배움의 기회를 누리길 바라셨다.
그 숭고한 뜻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명신 고등학교는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조용히 명신고등학교를 찾으셨다.
오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학교는 금새 따뜻한 들썩임으로 가득 찼다.
그중 한 학생이, 어르신 곁을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선생님의 뒤를 따르더니 어느 순간, 조심스레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그 한마디에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다.
선생님은 활짝 웃으시며,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이셨고 학생은 마치 오래 기다려온 기회를 얻은 듯, 기쁨을 가득 안고 선생님을 꼭 안았다.
지켜보는 내내, 생각지도 못했던 그 따뜻한 광경에 어느새 눈가가 붉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존경이었고, 사랑이었고,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심의 포옹이었다.
아마도 이 학생은 오늘의 이 순간을 영원히 못 잊으면서 평생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갈 것 같다.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나와, 어르신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보려 손을 내밀었다.
학생들의 표정은 밝고 단정했고, 마치 누군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선생님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이 학교는 단순한 명문이 아니라, 김장하 어르신의 정신을 실천하는 가장 따뜻한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교실에서 교사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교사한테 폭력까지 행사하는 서글픈 뉴스가 낯설지 않다.
사랑과 존중이 사라진 교육 현장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를 드러낸다.
하지만 명신 고등학교는 달랐다.
그곳에는 김장하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 나눔과 무언의 가르침이 학교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고, 그것은 학생들의 태도, 눈빛, 말투 속에 자연스레 드러났다.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가르침이 되는 사람.
김장하 선생님이란 바로 그런 어른이었다.
김장하 선생님은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봉사만 하셨다.
환하게 드러내지도, 자랑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조용히,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오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돈보다 귀한 것은 마음이고, 성공보다 깊은 것은 나눔이라는 사실을 어르신은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김장하 선생님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이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분명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남성당 한약방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던 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성스러운 한약방 안에 깃든 어르신의 삶과 철학,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의 따뜻한 나눔이 이제는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허전하고 먹먹하게 다가왔다.
그순간, 문득 얼마 전 감동 깊게 보았던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동안 살아오시느라고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그 말처럼, 나도 김장하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 오랜 세월, 묵묵히 버텨주시고 조용히 베풀어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는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이렇게 고귀한 장소가 그냥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그러던 찰나, 참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MBC 경남 뉴스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오는 10월 이곳은 “진주 남성당 교육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연다고 한다.
진주시가 이 건물을 매입해 보존과 활용을 결정한 것이다.
1층은 주민들의 바람대로 한약방의 원형을 최대한 그대로 보존하고, 2층과 3층은 진주의 자랑인 형평운동을 비롯한 지역의 역사 콘텐츠 전시와 교육 공간으로 운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김장하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나 역시 그 길을 함께 걷고 싶다.
평생을 자가용 하나 없이, “사부작사부작‘걸으며 다니시던 어르신의 발걸음을 따라, 그 분이 즐겨 찾던 냉면집에도 가보고 싶고, 정성을 다해 세우신 명신고등학교도 들러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땀과 정성과 사랑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남성당 한약방에 꼭 서보고 싶다.
그곳은 단순히 ’지역의 한 장면‘으로 남을 공간이 아니다.
소리 없이 베풀고, 이름 없이 살아간 한 사람의 위대한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 모두의 기억이자 위로의 공간이다.
김장하 선생님의 삶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건, 그분의 곁에서 조용히, 묵묵히 함께 걸어온 사모님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모님 역시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러나 누구보다 깊은 마음으로 남편의 곁을 지켜오셨다.
김장하 선생님께서 사모님을 부르시는 한마디~~
“우리 복순씨~~”
그말 한마디 속에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 그리고 평생을 함께한 동지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들어온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그 부모를 빼닮았다.
요즘 세상엔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무심하다가도, 돌아가신 후엔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면서,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도 흔하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님의 가족은 달랐다.
부모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을 더 멀리, 더 깊게 이어갈 수록 있도록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이다.
이 가족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한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남는 삶의 방식이라고. , 묵묵히 함께 걸어온 사모님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모님 역시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러나 누구보다 깊은 마음으로 남편의 곁을 지켜오셨다.
김장하 선생님께서 사모님을 부르시는 한마디~~
“우리 복순씨~~”
그말 한마디 속에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 그리고 평생을 함께한 동지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들어온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그 부모를 빼닮았다.
요즘 세상엔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무심하다가도, 돌아가신 후엔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면서,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도 흔하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님의 가족은 달랐다.
부모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을 더 멀리, 더 깊게 이어갈 수록 있도록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이다.
이 가족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한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남는 삶의 방식이라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정지아 작가님께서 ‘해방일지’에 등장하시는 작가님의 아버지와 김장하 어르신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작가님의 아버지는 술을 사랑하셨고, 어르신은 술을 안 드신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란다.
하지만 사람이란 함께 살아가야한다면서, 늘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두 분이 가장 많이 닮으셨단다.
그리고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두 분의 공통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정지아 작가님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콕 찔렀다.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거나, 수 십조의 재산이 있다거나, 이런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선한 영향력을 누군가에게 미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지아 작가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우리 집 양반이 생각이 난다.
주책없이 괜히 눈물이 난다.
늘 집돌이에 삼식이라고 속으로 많이 원망을 해오던 사람인데, 정지아 작가님이 아버지를 떠올리는 모습에, 문득 나도 그동안 남편이 알게 모르게 베풀어왔던 선행이 생각이 난 것이다.
우리집 양반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선 돈 한 푼 쓰는 걸 아까워하면서도, 남들 먹이고 돕는 일엔 전혀 아까워하지 않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힘들게 살던 시절에도, 교회에서 누군가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본인의 이름도 남기지 않고 익명으로 도와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김장하 어르신처럼 큰 나눔을 한 건 아니지만, 어르신의 철학처럼 나름 살아왔다.
크게 자랑할 만큼 베풀지는 못했어도, 이렇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우리 집 양반의 늙은 모습에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아무리 답답한 생활을 하더라도,결코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을 해본다.
모두가 김장하 선생님같은 위인이 될 수는 없지만,
우선은 남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사줄 수 있는 정도의
마음으로라도 시작을 해본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사회를 지탱하는 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어르신의 말씀에 힘이 난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