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역이민 생활
우리 집 양반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어릴 때 피난 살이 하던 대전으로 가보고 싶다고…
11살 때 피난 갔으니까 지금 가면 70년 만에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1968년에 한국을 떠나서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더니
꼭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단다.
그 당시의 기억이 그다지 생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당시 살던 곳이‘한우물”이라는 것은 생각이 난단다.
무작정 인터넷에 “한우물”을 검색해 봤더니
다행히 그 동네가 남아있었다.
바로 비행기 표 예약하고 우리 집 양반하고 둘이서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으로 향하는데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
물어물어 도착한 대전!
세상에나 …
그 옛날 “한우물”이라는 우물 터가 이렇게 기념비로 남아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옛날 기억을 되살리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길 건너편에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이 동네는 개발이 안돼
그 덕분에 옛날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옛날 추억을 조금이라도 건져 올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그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마침 그 동네에서 오래 사셨다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가 있어서 그동안의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다.
다행히 70년 전에 피난살이하면서 같이 놀던 친구의 이름을
안 잊어버리고 있어서 그 친구에 대해 물어봤더니
아 글쎄 그분이 아직도 그 집에 사신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신다.
그런데 더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마침 그분이 일 나가시느라고
집에서 나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70년이 지나서야 만나다 보니
서로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아이고, 자네가 철수인가…
나 알아보시겠는가…
그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면서 인사만 할 뿐이었다.
70년이라는 세월, 참 길고도 긴 세월이었다.
이미 다른 분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던가
아니면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우리 집 양반이 피난살이할 때 옆집에 사셨던 누이 한 분이
담장 너머로 옥수수도 건네주곤 하던 기억에
그분을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갔는데 안타깝게도 오래전에 돌아가셨단다.
우리 집 양반 그 소식 듣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데
영 마음이 안 좋았다.
이 근처 어디쯤이었는데 하면서 지금은 없어진 집들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또 찾아보는 우리 집 양반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해 보이던지 괜스레 나 또한 서글퍼졌다.
우리 집 양반은 옛날 피난살이하던
이 “한우물“이라는 마을을영 떠나기가 싫은지
지금은 기념비 밖에 남아있지 않은 마을 어귀에서
그 기념비에 쓰여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자꾸만 옛날 살던 곳 찾아다니고 싶어 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참 안쓰럽기가 그지없다.
우리 집 양반처럼 전쟁 겪고
또 무지막지하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한테
꼰대에다가 늙은이라고 구박만 하지 말고
서로서로 이 아픈 상처들을
보담 아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이런 곳을 다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아온 불쌍한 우리 집 양반!
오늘도 맛있는 김치전에 막걸리 한 잔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