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바꿀 수 있고,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하루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실수할까 노심초사하지 않으면서 신명나게 보낼 수 있다. 일상의 걱정 90%는 현실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말을 입증이나 하듯이,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것은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돌아가 당초 목표대로 고치면 되니까 말이다. 현실은 과연 그러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의 허약함과 욕심 가득한 마음을 허락할 리 없다.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재활용도 안된다. 저축도 안될 뿐 아니라 쪼개어 쓸 수도 없다. 흘러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시간의 패턴이다. 그러하기에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역설적으로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어쩔 수 없지. 이것은 운명이니까!’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삶을 포장하기보다, 내 손으로 내일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기억은 과거를 반영하지만, 상상력은 미래를 만든다’라고 했다. ‘목적(why), 목표(what), 방법(how)’이 중심축이다. 세 가지 키워드로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 보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면 된다. 과거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미 끝난 상황은 인정하는 것이 불안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놓아주자. 다만, 어제의 실수나 실패를 미래에도 똑같이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흘러간 시간에서 내일의 좌표로 삼을만한 인사이트(insight)를 찾았다면, 미래는 어제와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할 것이다. 운명이라는 나약한 변명으로 자신의 삶을 칠갑(漆甲)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인간은 왜 과거에 집착할까? 이미 지나간 시간에 연연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생각했던 만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자 미련일 것이다. 점철된 후회의 결과물일 것이다. ‘무엇을 했었더라면....’이라는 가정문(if문)이 등장하는 연유가 아닐까 싶다. 과거는 후회로 켜켜이 쌓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무 상심할 필요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실패에서 배운 후회는 분명 성장의 마중물이다. 세계적 심리학자 캐럴 드웩(Carol Dweck)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도전적 과제에 임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피드백은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따라 미래 선택지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로 ‘성장형 마인드셋(Growth Mindset)’과 ‘고정형 마인드셋(Fixed Mindset)’이다. 요즘 트럼프 정부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엘런 머스크이다. 앨런 머스크는 화성 탐사를 위해 ‘스페이스 X’를 추진했다. 수차례 실패했지만, 앨런 머스크는 거듭된 실패는 성장의 밑거름이라는 신념으로 원인을 찾고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결국 화성 탐사용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과거를 수정할 수는 없지만 실패한 과거에서 미래를 여는 단초를 발견한다면, 실패했던 시간은 결국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된다. 성장적 마인드셋은 실패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도전을 즐긴다. 상대방의 지적은 성장을 위한 마중물로 받아들이는 겸허하면서 열린 자세를 갖는다. 이런 성장적 마인드셋의 보유자는 굳이 과거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실패한 과거를 디딤돌로 삼아 꿈꾸는 미래를 개척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미래를 꿈꾸는 걸까? 무엇을 위해 애쓰는 것일까? 즐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유한한 시간을 굳이 골머리 아픈 것에 몰입하고 투자하는 이유는 뭘까? 누구나 풍요롭고 안정적이며 편안한 삶을 갈구(渴求)한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내일의 삶이 될 수 있다면, 아낌없이 ‘지금’이라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기 위해 투자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력(努力)’은 갈구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만병통치약이다. 쓸모없는 노력은 없다. 성찰은 노력을 쓸모 있도록 만드는 매개(媒介)이다.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반석 위에 펼쳐진 노력은 늘 복리(複利)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 배신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력한 이상으로 갈구의 목마름이 촉촉함으로 젖어 든다. 우리 속담에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란 말이 있다. 첫 발을 내딛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라는 삶의 가르침이다. 이 속담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 되는 이유는 뭘까? 시작했다고 모두가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실패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이 속담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의미가 바뀌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 해석이 다르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현상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다름과 차이’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틈새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양성과 창의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하던 농경적 근면의 1980년대까지는 이 속담이 사회적 함의가 있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반에서 몇 등 하니?’, ‘공부 잘 하니?’와 같은 ‘지식’ 중심 사회는 설 땅을 잃었다. 모두가 천재다. 늘 손에 백과사전 한 권이 들려 있다. 공간과 시간의 구애 없이 24시간 어디서든지 검색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뭐 해 봤는데?’의 문제해결형 경험과 연륜이 주목받는다. 그 경험이 미래 먹거리를 생성한다. 자신의 노후를 보장한다. 농경사회에서 정보지식사회로 전이되면서 일거리와 일자리는 엄청난 속도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자기주도적 선행적 학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저 그런 삶’이 될 것이다. 변명으로 점철된 그런 삶 말이다. 미래는 꿈꾸는 자에게만 허용된다. 꿈만 꾼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준비’와 ‘노력’이라는 마중물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선택지와 후회 없는 삶은 ‘준비된 자’에게만 허용된다. 3차 산업혁명시대까지는 ‘준비될 자’에게도 설 자리가 제공되었다. 이제는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준비될 자’가 아닌 ‘준비된 자’에게만 길을 터 주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된다. 갓 사회인으로 진출하는 취준생에서부터 정년퇴직 이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장년층까지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21세기 사회 법칙이나 진배없다. ‘경력직’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준비는 발품을 팔고 시간을 투자하는 ‘노력’이 겸비할 때 획득할 수 있다. 그것도 적극적이며 능동적일 때만 말이다.
어릴 적 초등학교 방학숙제 단골 메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루 일과표와 일기였다. 방학 첫날 야심차게 일과표 만들기에 도전한다. 다음 학기에는 부모님 얼굴에 주름살을 펴 주기 위해 이 번 방학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시간표를 그린다. 현실은 어떠한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옆집 철수가 놀자고 한다. 점심 먹고 나면 졸음이 몰려 온다. 어느새 뉘엿뉘엿 하루가 저물어 가면 저녁 먹고 일찍 잔다. 놀고, 먹고, 쉬고, 잠자는 일과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덧 개학이 다가온다. 앞이 깜깜해진다. 손에 꼽을 만큼만 기록된 일기장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일기장에는 날씨 표기하는 공간이 있다. 지나간 날의 날씨를 맞춘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더듬어 봐도 한달 전에 비가 왔는지 해가 났는지 흐렸는지 기억이 날 리가 없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기록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회는 가슴을 먹먹하게 할 뿐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다음 방학 때에도 똑 같은 행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무지함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일기장은 제출했지만, 그 내용은 진실이 아닌 소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은 잘 안다. 일기장의 자신 모습은 허구라는 것을 말이다. 지나간 어린 시절을 교재삼아 앞으로 남은 인생 후반전 준비는 게을리하지 말자. 지나온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고칠 수 없기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철저한 소비재인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나이가 들면 미래 준비는 더 철저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령인구의 빈곤율은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38.2%로 2022년보다 0.1%p 증가했다. 고령인구 비율 상대적 빈곤율은 OECE 1위이다. 우리나라 유병기간은 2022년 생명표(통계청) 기준으로 남자는 14.8년, 여자는 19.1년이다. 평균 약 16~17년을 병과 함께 장수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노인자살률은 OECD 가운데 압도적 1위이다.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외로움을 빼놓고는 얘기하기에가 쉽지 않다. 고령 1인 가구가 어느 세대보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청 자료를 보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결국 장수(長壽) 3대 리스크인 가난(경제), 질병(육체), 외로움(정신)이 우리 사회에도 전염이 되었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다. 이미 선진국을 통해 어떤 문제가 닥칠지 알고 있었다. 정답이 무엇인지도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를 하지 않았다. 개인도, 국가도 말이다. 그래서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요 사회가 떠안아야 할 짐이 되었다. 늦었다고 넉 놓고 한탄만 할 일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그것만이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자 미래의 확장성을 보장하는 일이다. 미래의 해상도를 선명하게 하는 방법이다. 비록 늦었지만 그나마 역설적으로 지금이 가장 빠른때라는 점을 잊지 말자. 준비된 자에게만 미래는 문을 열어 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자신의 준비를 점검하는 하루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