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무관심’은 ‘생산적 외로움 근력’ 만큼이나 어설프기는 매한가지이다. 뭔가 어색하다. 무관심과 따뜻함이 결이 맞는 걸까 의심이 든다. ‘이게 말이 돼?’라고 스스로 되물어 보게 된다. 낱말이 머금고 있는 온기를 느껴야 이해가 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관심이 높아지고, 높아진 관심은 간섭으로 번지기 일수다. 간섭의 횟수는 나이와 비례해서 점점 심해지는 반면, 간섭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심정 또한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진다. 간섭은 관계를 이간질 시키는 멀리해야 할 존재 중 하나이다. 간섭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공공의 적인 ‘꼰대’로 가는 지름길이다. 라떼문화의 주연 배우인 ‘꼰대’는 모두가 손사래를 친다.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시발점은 소통 개념의 곡해이다. 흔히 소통은 정보교환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직책이 높거나 연륜이 들면 가르치려 한다. 한 겨울에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 있듯이, 숫자에 불과한 나이만큼 켜켜이 쌓인 연륜이 곧 지혜라는 그릇된 인식이 불러온 재앙이다. 소통은 정보교환이 아니라 ‘공감(共感) 교환’이다.
감(感)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호감(好感), 공감(共感), 동감(同感)이다. 이 세 단어에는 따스함이 듬뿍 머금고 있다. 호감(好感)은 한 톨의 씨앗이 대지 위로 머리를 내미는 과정이 궁금하듯 이타적에 대한 관심이다. 호감은 모든 관계의 첫 관문이자 관심으로 시작하는 긍정적 에너지다. 이타적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다. 이러한 호감이 커지면 정서적 연결의 공감(共感)이 된다. 호감이 ‘안다’의 뜻이라면, 공감은 ‘이해한다’이다. ‘안다’는 단방향이라면 ‘이해’는 쌍방향이다. ‘상대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라(Don’t judge a man until you have walked in his shoes)’라는 미국 속담처럼 타인의 입장과 경험을 먼저 이해하려는 자세가 바로 공감이다. 리액션(reaction)이다. 수다의 시간은 리액션의 횟수와 비례한다는 웃픈 얘기도 있다. 카카오톡이 ‘옳고 그름’이 아닌 ‘좋아요’를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소통은 정보교환이 아니라 공감 교환이라는 것을 방증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상대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공감은 그만큼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끈끈하면서 돈독한 관계의 마중물이다. 마지막으로 동감(同感)이다. 동감은 호기심과 감정적 연결을 초월한 가치관의 합치이다. 관계의 최상위 개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호감과 공감이 좋은 감정이라면 동감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다.
주제로 돌아와 ‘따뜻한 무관심’은 뭘까? 굳이 무관심을 구분하자면 무관심의 따뜻함은 방목형이요, 차가움은 방임형이다. 방목과 방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방목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보장하고 배려한다. 방임은 아예 관심이 없다. 돌볼 의사도 없고 간섭할 생각도 없는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아닌 남남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방목형의 따뜻한 무관심은 호감을 디딤돌로 공감을 징검다리로 활용하는 존중과 배려의 관계이다.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왜?’라는 질문으로 이타적 의견을 끌어내고 가능한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책망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답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왜?’에 대한 이타적 의견을 들어 보고 최대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노력하기 위함이다. 설사 대답이 자신과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고 해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아!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와 같이 먼저 수긍하려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만약 의견이 다르다면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에 자신의 입장과 함께 설명한다. 로보틱스에서 휴머노이드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슬프거나 기쁜 표정을 구현하는 인공지능 아메카(ameca)가 정해진 각본이 아닌 딥러닝, 머신러닝으로 사람과 대화하는 세상이다. 문제해결의 길은 정말로 다양해졌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로 판단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직감한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는 협소해진다. 특히 은퇴 전후하여 가족 관계가 삐끗하게 되면 원상복구가 정말 어렵다. 자신이 노년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배우자도 나이가 든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다. 자녀도 성장하여 사회인으로서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인정해야 한다.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조력자로 변해야 한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보호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성인이 되면 촘촘했던 울타리도 훨씬 넓어져야 하고, 튼튼한 열쇠 소유권은 부모에서 자녀로 이양되어야 한다. 곁에서 지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른이 소유하고 있는 비장의 무기인 연륜도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많아졌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훈수 두기도 어렵다. 조금 내려 놓고 한 발자국 물러서자. ‘잘 할거야’라는 믿음으로 따스한 눈길만 두면 어떨까 싶다. ‘따뜻한 무관심’은 자신도 살고 이타적 관계도 돈독해지는 종합비타민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