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쎄 Oct 29. 2023

B급 감성, 그 정도의 삶을 살고 싶어졌다



옛날, 아주 옛날에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정지우 작가‘는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계속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때부터 매일 글을 쓰며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병원에 들렀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직업란에 ’작가‘라고 썼다. 쓰고 나서 본인도 어이가 없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작가 행세‘를 했다.


며칠 전 ’이승우 작가‘와 전화를 한 통 하게 되었는데, 내가 쓴 글을 보더니 “작가해도 되겠다”며 말해 주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몰라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래, 나도 언젠가는 글을 써서 먹고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했다.


오늘은 어느 누군가의 사적인 글 몇 자를 보았는데, 글자 몇 자에 마음이 설레는 게 아닌가. 크게 의미 있는 글은 아니었다. 단순히 오늘 하루 먹었던 것을 기록하고, 가졌던 생각을 몇 단어로 푼 것뿐. 거대한 담론도 아니었고 한 사람이 살았던 삶을 옮겨 적은 진실한 몇 글자였다. 아무래도 나는 글자를 좋아하는 사람인 게 틀림없는 듯하다. 글에는 삶과 사람이 담겨 있으니까.


하지만 사적인 기록이 책으로 만들어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물론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같은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내가 쓴 일기가 책으로 만들어질 경우는 드물다. 만들어질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읽힐 확률은 적다. 엄마나 친구 몇 명 정도 읽어줄 수 있지만, 크게 의미 있는 책은 안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책을 만든다는 건 봉준호 감독이 말했던 아주 사적이지만 전 세계적인 그런 글이어야 한다든지, 아니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글이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작가들은 ‘내 글이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글일까요?’ 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면 편집자로서 나는 “그럼요!” 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작가라면 내 글을 두고 ‘사회에 도움이 될까‘ 묻는다면 대답은 아마도 ‘글쎄요‘일 게 뻔하다.


어쩌면 삶에 필요한 건 ’뻔뻔함‘일지 모른다. 조금의 당당함을 곁들인 그런 뻔뻔함. 출판을 잘 모를 때 나는 내가 쓴 글들을 모아 여러 책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았다. 표지도 개똥으로 만들어 인디고 인쇄를 해 서점에 포스트잇을 붙여 팔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이게 책이야?” 하며 무시하는 피드백을 줘도 “내 개성이야“ 하면서 책을 만들어 팔았다. 심지어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기도 했고, 매번 돌아오는 피드백은 ”별로네요“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출판사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다며 스스로 책을 만드는 걸 선택했다.


요즘 눈이 높아졌는지 내가 스스로 쓰는 글이나 글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당함이나 뻔뻔함이 조금 사라졌다고 할까. 글이나 생각에 힘이 점점 없어진다고 느껴진다. 아무 말이나 내뱉던 어린 날의 패기가 없어진다고 할까. 매번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인생을 마주하게 된 걸까. 나이가 먹으면 다들 이렇게 겁이 많아지는 걸까. 말 한마디에도 여러 생각들을 해야 하는 복잡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머리가 조금 아파온다. 이렇듯 사소한 이야기들을 사람들 앞에 내뱉는 것이 어색해진 건 아닐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려운 요즘을 사는 건 아닐까. 솔직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보고 마음이 설렜던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 조금 정갈한 것보다 B급 감성, 그 정도의 삶을 살고 싶어졌다. 거창한 삶 말고. 대단한 글은 아니어도, 적당한 글, 그런 글을 쓰고, 그런 책을 만들고 싶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