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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Apr 02. 2024

조 같은 회사생활



회사는 가끔 대학교 때 발제를 위해 만들어진 조 같다. 대학교 발제를 보면 공산주의가 왜 자본주의에 밀리게 되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이 모든 수고를 도맡아도 점수는 동일하다. 종종 발제를 한다거나 조장을 맡으면 조금의 점수를 더 주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가산점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버스를 타고 적당한 도착지에만 가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른 사람들보다 중간 이하로 뒤처지지 않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니 앞서 걸어가고 싶은 사람은, 조금의 점수를 더 받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의 일을 더 하거나 노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결과는 동일하게 가져간다.


회사에 어떤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본다. ’자, 이 프로젝트를 누가 주도적으로 맡을 것인가! 누가 이 일을 담당할 것인가!’ 나는 대학교 때부터 나서기를 좋아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담당하곤 했다. 적어도 대학교 때는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수고했다고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는 조금 달랐다.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나서도 지랄, 안 나서도 지랄 맞다. 나서면 나댄다고, 안 나서면 안 나선다고 눈치를 준다. 조금 잘못 나서서 일이 쌓여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그건 네가 한다고 한 거잖아?” 하고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어떻게든 일을 떠넘기려 노력한다.


최근에 어느 농구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개인보다 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팀보다 중요한 개인은 없습니다.“ 그래, 그 말도 맞다. 그건 농구니까. 그런데 회사는 조금 다른 듯하다. 만일 모든 사람이 팀보다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호구가 된다. 우리는 서로 각자 할 일이 있고, 자기 자리 앞에 앉아서 컴퓨터만 보고 있으면 경력이 쌓이고, 월급을 받고, 하루를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직장인이 될 수 있다. 이게 현실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비도덕적 사회와 도덕적 인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아무리 도덕적인 인간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 사회 전체가 비도덕적이라면, 도덕적 인간은 도덕적일 수 없다.” 그렇다. 그러니 회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개인적이라면, 협력을 추구하는 개인 한 명이 회사를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도생은 생존의 법칙이다. 각자도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도태되고, 회사에서 잘리거나 고립되거나 결국 타인을 위하는 시간을 보내다 홀로 남게 될 것이다.


회사는 대학교 때 발제를 위해 만들어진 조 같다. 서로에게 조장을 맡기기 위해, 마치 마피아 게임을 하듯 누가 호구인지를 찾아내 그 호구에게 모든 궂은일을 다 맡기려는 철없는 대학생들이 모인 조 같다. 나는 대학교 때 여러 번 호구가 된 이후로 조장은 결코 하지 않으려 했었다. 오히려 조장을 하는 대신, 조장을 그 누구보다 돕는 서포트 역할을 하려 했었다. 그러면 적어도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발제를 준비하니, 혼자 하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조장에게 ’생색‘낼 수도 있고, 나는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그는 나에게 고마워하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발제를 준비하는 방법이었다. 또한 내가 생존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여러 명이 협력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내 편 한 사람만 있어도 어느 정도 살 만하다. 조 같이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곳에서 호구를 찾기보다 누가 내 편인지, 누가 조장의 덕목을 갖추었는지를 살피고 옆에서 서포트할 수 있다면, 그 발제는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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