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경복궁, 법궁(法宮)의 무게와 'The Buck'의 자리
종로3가역에 내려 육의전(六矣廛)거리를 걷는다. 빌딩 숲 아래 좁은 유리 바닥 밑으로 조선의 상도(商道)가 잠들어 있다. 태종의 금란전권이 독점의 질서를 세웠다면, 정조의 통공정책은 자유로운 소통의 물길을 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 최초의 국영 상설시장은 그렇게 면면히 이어졌다. 1905년 사설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이라는 민초의 터전으로 살아남았다.
발길은 탑골공원으로 이어진다. 손병희 선생의 외침과 기미독립선언의 기개가 서린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 석탑 앞을 지난다. 1894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교동소학교와 1907년 미국에서 출발한 한국라이온스클럽본부의 흔적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We Serve(우리는 봉사한다)'. 국제라이온스 354-D지구 개포클럽의 일원으로서 마주한 그 구호가 가슴을 친다. 봉사란 결국 타인을 위해 내 자리를 성실히 지켜내는 또 다른 방식의 '개근'이 아니겠는가.
운현궁에 들어서니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그림자가 깊다. '독서하지 않는 리더'의 시야 한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노안당(老安堂) 앞에서 탄식한다. 만약 그가 철종의 즉위 과정에 무관심했더라면, 아들 이명복(고종)을 영조의 현손이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랬다면 겁 많은 세도가들도 차라리 순리대로 외세를 받아들여 역사의 파국을 늦췄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운현궁 마당을 거닐며 '현(峴)'이라는 글자의 주인을 찾았다. 논현, 아현, 남현, 율현... 모두가 제 몫의 가파른 고개와 언덕을 품고 있는데, 유독 운현만은 평탄하다. 안국역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삼일대로는 본래 서운관(書雲觀) 앞의 높다란 '구름 고개'였다. 근대의 포크레인이 그 고개를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었을 뿐, 땅의 기억은 여전히 '운현'이라는 이름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이 태어난 이곳은 본래 '운현댁'으로 불리었다. 고종이 즉위한 후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을 짓고 나서야 비로소 '운현궁'이라는 격을 갖추었다. 운현궁을 나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274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고종에 의해 중수된 경복궁으로 간다. 고종과 대원군도 1867년, 새로 닦인 이 길을 따라 경복궁으로 향했을 것이다.
홍예문과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을 차례로 돌아본다. 경회루의 웅장함 너머 향원정을 바라보지만, 그 뒤편 건청궁은 차마 가슴이 아파 고개를 돌린다. 1895년 을미사변의 명성왕후 절규와 조선 파탄의 파열음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나마 경회루 앞 수정전(옛 집현전 터)에 머물며 성군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을 그리워한다.
경복궁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심장이었다. 근정전 앞마당의 박석들을 밟으며 나는 '왕의 자리'를 생각했다. 이곳은 화려한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굶주림과 외세의 위협이라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져야 했던 고독한 결단의 자리였다. 이 거대한 공간은 사실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비어있었다. 태조가 세우고 세종이 꽃피웠으나, 태종 이후의 왕들은 경복궁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이라는 피 묻은 기억과 엄격한 법도를 피해 창덕궁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까지 수백 년간 조선의 진짜 심장은 창덕궁에서 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비어있던 심장을 되살리려 무리한 중건을 강행했다. 리더십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무너진 왕권을 세우겠다는 마지막 절규였을까. 이제 나는 이방원이 휘둘렀던 피 묻은 칼날의 기억을 피해 왕들이 달아나 숨어든 안식처, 창덕궁으로 향한다.
그들이 닦은 율곡로를 따라 걷는 길 위에서 나는 '환경을 선택하는 리더의 안목'을 반추한다. 훗날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이 창덕궁 뜰에서 답안지를 채우며 조선의 미래를 논할 때, 경복궁은 고독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다시 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군 세종이 밤을 지새우며 글자를 만들고, 고종이 쓰러져가는 국운을 붙잡으려 애썼던 이 터전은 이제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생(生)에서 어떤 책임을 완수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