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광화문 앞과 전각 사이사이에 뿌려진 형제들의 피는 태종 이방원에게 지울 수 없는 족쇄였다. 왕이 된 그는 법궁인 경복궁을 외면하고, 자연의 품에 기댄 창덕궁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 리더는 스스로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만든 처참한 환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기도 하는 법이다.
운현궁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숙장문과 인정문을 지나 인정전 마당을 밟으며 역사의 오묘한 조화를 생각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지은 궁궐에서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 같은 천재들이 나라의 미래를 논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피의 역사를 씻어내기 위해 세운 안식의 공간이었기에, 이곳은 더더욱 고결한 학문의 향기가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대조전과 희정당을 바라보며 숙종 대의 엇갈린 운명들을 떠올린다. 장희빈이 중전으로서 대조전의 영화를 누릴 때, 그녀는 등잔 밑 낮은 곳에서 시작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숙종과 무수리 최씨(최숙빈)가 처음 마주치고 사랑을 나누었던 보경당(寶慶堂) 자리를 가늠해 본다. 이곳은 훗날 영조가 태어난 기적의 산실이기도 하다. 과연 비천한 무수리가 감히 폐비를 위해 상을 차리는 게 가능했을까?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진심 어린 의지였다. 권력의 높이를 재던 장희빈과 신의의 깊이를 증명한 최숙빈의 길은 그렇게 갈라졌다.
훗날 장희빈이 취선당으로 밀려나 대조전을 바라보며 집착의 신당을 차릴 때, 그녀의 눈에 지금의 단아한 낙선재(樂善齋)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그저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외진 언덕이었을 뿐이다. 숙종 시대의 암투가 지나간 130년 뒤에야 사랑과 슬픔의 공간인 낙선재가 들어섰으니, 역사는 이처럼 비극이 할퀴고 간 자리 위에 새로운 사연을 덧칠하며 흘러간다.
발길은 영조의 숨결이 시작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 머문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연잉군에게 궁궐은 화려한 보금자리가 아닌,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는 가혹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복헌의 낮은 문턱을 넘나들며 인내를 배웠다. 훗날 숙빈 최씨가 궁궐을 나와 창경궁 담장 너머 지척에 있던 사가 이현궁(梨峴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연잉군은 궁 안의 집복헌과 궁 밖의 이현궁을 부지런히 오가며 성장의 시간을 채웠다.
효심으로 점철된 그 짧은 외출의 길 위에서 연잉군은 비로소 '진짜 세상'을 만났다. 배오개 시장의 떠들썩한 소음과 민초들의 땀 냄새를 맡으며,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 권좌의 높이가 아닌 백성들의 삶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길목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청년 박문수와의 인연 또한, 어쩌면 어머니를 향한 그 지극한 발걸음이 가져다준 역사의 선물이었으리라. 연잉군은 자신을 옥죄는 궁궐의 암투 속에 갇히는 대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스스로 '백성의 왕'이 되는 의지를 다졌다. 그날 남촌의 이름 없는 주막에서 박문수와 나누었을 포부는 훗날 탕평과 균역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끌어낸 셈이다.
이러한 연잉군의 인내와 남촌에서 마주한 백성의 고통은, 손자 정조가 주합루(宙合樓)에서 꽃피운 학문적 성취의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창경궁 문정전 뜰, 아버지가 뒤주에서 죽어간 비극의 토양 위에서도 정조라는 거목은 자라났다. 그는 피의 복수 대신 주합루의 학문을 선택했다. 1층 부용루에서 지식을 벼리고 2층 주합루에서 우주를 논하던 정조는 시를 짓지 못한 정약용에게 '장난스런 유배'를 보내고, '불취무귀(不醉無歸)'의 소통을 나누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제 나는 왕들의 장엄한 기록을 뒤로하고, 민초들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이 요동치는 광장시장으로 향한다. 주합루의 열 계단 끝에서 만난 것이 왕의 이상이었다면, 시장의 낡은 의자 위에서 만날 것은 바로 우리네 살아있는 인생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보경당의 진심이 집복헌의 인내를 거쳐 시장통 상인들의 억척으로 치환되는 곳. 숙빈 최씨가 숨을 거두고, 연잉군과 박문수가 세상을 논했을 그 배오개 시장에 5명의 후예들이 모인다.